한줄 詩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마루안 2020. 10. 30. 21:47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한때 저녁이 있었다, 시침이 덜컥, 덜컥 움직여 기울어간 어느 시간이 아니고, 석양이 산꼭대기에서부터 산자락을 향해 내쳐 달려들 때 두려움으로 염소들의 동공이 더 커지기 전에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런 저녁이었다.

밤나무에 올라 나무를 흔들어 밤을 터는데, 동생들이 떨어지는 밤송이를 피하며, 조금 있으면 어둠이 곳곳에서 버섯처럼 돋아나 떨어진 밤송이를 주울 수도 없다고 소리치던 그런 저녁이었고, 들마루에 앉아 저녁을 먹으려던, 생쑥을 잘라 모깃불을 피워 올리던, 그런 저녁이었다.

한때 저녁이 있었으나, 그 저녁이 오래 가리라고 믿었으나 이제 저녁은 가고 없고, 모깃불 연기도 밤송이의 낙하도 멈추었다.

한때의 저녁이 지금 스며들고 있다. 석양이 와서 말하길, 수십 개의 산을 넘으며 수십 개의 사연을 들었는데, 이제 눈이 아프고, 귀가 아프다고.

나도 석양에게 답했다. 몸속에 수십 개의 저녁이 있었는데, 그중 몇이 그대에게로 날아가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거라고.


*시집/ 풍경 도둑/ 모악출판사

 

 




풍경의 정거장 - 천세진


오랫동안 덜컹거리며 굴러온 생이, 풍경의 정거장이 된 걸 알았다.

연분홍 수국이 피었고, 꽃에서 샛별 목욕물을 졸인 향기가 났고 잎들은 매끈하여 시간이 종일 미끄럼을 타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이름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풍경들만 머물렀다 떠나는 정거장이 된 걸 알았다.

풍경의 시간표를 따로 걸어두지 않아도 언제 어느 때 꽃들이, 새들이, 향기들이 정차하는지를 모두 알았다.

한때는 이름의 정거장이었다. 읽어낸 이름들이 머릿속에 머무르곤 했는데, 한 번 머문 이름들은 잊지를 않아서 다들 놀라곤 했다. 정거장에 온 적도 없는 먼 이방의 이름들과 겪어보지 못한 시간과 사건들의 이름까지를 줄줄 외워 더욱 놀라곤 했다.

이름의 정거장이 된 걸 우쭐대고는 했는데, 정거장에 오지 않은 이름들은 고사하고 정거장에 머물렀다 떠난 이름들까지 하나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름이 사라지고 풍경만 왔다 떠나는 정거장이 되었지만 하나도 심심하지 않다. 한때 이름의 정거장이었던 시절이 화려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닫고 나니 더 심심하지가 않다.

풍경 하나가 또 들어오고 있다. 어서 나가 수신호를 해주어야 한다.




# 천세진 시인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와 방송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순간의 젤리>, <풍경 도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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