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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신발 - 심종록

낡은 신발 - 심종록 신발을 잃어버렸다 백감독도 만나고 인디안 수니도 만나고 반가운 사람 손도 잡아 흔들고 초면인 사람과 통성명도 하고 삶과 죽음이 뒤섞인 자리 밤늦은 시간이지만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잔 마다하며 입술이나 축이다가 자정 근처에서 일어섰는데 신발이 없다 다리 아래 좁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첫 발 떼기 시작할 때부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지금은 몇 번째인지 톺아볼 순 없지만 여기까지 나와 동행한 신발이여 나의 분신이여 사제를 함께 하자던 도반이여 때로 똥 밟은 자존심의 더러운 위안이여 네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어느 쓸쓸한 날 세상과 하직하기 위해 백척간두에 올라서는 사람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후 한쪽 발부터 내민다는데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열에 아홉은..

한줄 詩 2020.10.22

이별의 서 - 허연

이별의 서 - 허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자주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 있었다는 것뿐 그사이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 같은 게 왔다 갔고 만국기처럼 별의별 일들이 펄럭였지만 우리는 그저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 철로가 있었고 노란 루드베키아가 있었고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있었고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많았지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 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

한줄 詩 2020.10.22

녹내장 - 김보일

녹내장 - 김보일 공덕동 서울안과에서 안구단층촬영을 했다 쌍계사 잎자루에서 천왕봉 꼭대기까지 뻗어나간 지리산 잎맥처럼 망막에서 뇌로 가는 시신경이 필름 속에 뻗어 있었다 내 몸은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느리고 있는지 스무 살의 처녀가 女子라는 이름으로 내 심장으로 온 것도 그 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한 女子의 나라에서 한 사내의 심장까지를 잇는 길가에서 검둥개가 짖고 복사꽃이 흔들리고 달빛은 천축의 불빛처럼 들썩였을 것이다 시신경이 차츰 사라지는 것이 녹내장이라며 의사는 안압을 낮추는 약을 내게 처방해 주었다 나는 필름 속에 사라져 가는 모래의 길들을 보며 그 길로 흘러들어 왔을 산초나무, 층층나무, 노간주나무 꽃나무들의 이름과 그 길로 흘러들어 왔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왼쪽 ..

한줄 詩 2020.10.21

바람의 무덤 - 서상만

바람의 무덤 - 서상만 어디가 더 다정한 무풍지대일지 알 수 없지만 구름처럼 어리둥절 떠돌아도 이 세상은 참 행복했다 하기야, 갈 때는 또 다른 바람 따라갈 것 뻔하지만 어쩌랴 이 세상 저 세상이 다 바람의 무덤인걸 바람의 속내를 나무랄 수야 봄바람이 불거나 낙엽이 지거나 눈보라 쳐도 눈물 없이 꿈꿀 수 없는 무명 거기 심산 독채에 오래오래 소경처럼 살아도 좋으련만 *시집/ 월계동 풀/ 책만드는집 말인즉 - 서상만 그래서 말인즉 나, 맨주먹이라도 차라리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새까만 세 살짜리 알몸뚱이로 그러나 내가 꼭 빗나간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치 않네 목숨 내놓고 버텨온 삶이지만 때 되면, 가지 말라 붙들어도 나는 떠나야 하리 오랜 날, 나를 길들인 그 바람이 어느 날 사정없이 나를 내동댕이칠 것이므로..

한줄 詩 2020.10.21

햇살 속의 슬픔 - 이봉환

햇살 속의 슬픔 - 이봉환 햇살 속에는 제 몸빛과는 다른 것들이 숨어서 있지 그것들 투명한 파장으로 둔갑하여서 우리 눈에는 그저 안 보이기 십상 깊어진 가을 쓸쓸함이 한이 없거나 맑아지고 맑아진 몸 빛깔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깜빡 그 존재를 드러내고는 하는 모양 그러고도 그 느낌이란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촉수를 바들바들 떨어야 어신처럼 톡, 톡, 그렇게 전해온다는데 때마침 '글루미 선데이'를 듣는다 지금 나 그걸 타고 당신에게로 갈까 해의 살을 타고 몰래몰래 투명함으로 그대에게 퍼져갈까 이 울림이 가을을 견디는 나의 힘이다 *시집/ 응강/ 반걸음 잠자리 생각 - 이봉환 나는 저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저들도 분명 제 안에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

한줄 詩 2020.10.21

얼마간은 불량하게 - 조하은 시집

어렸을 때부터 활자에 호기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옆 마을인 친구 집에 놀러 갈 때가 많았다. 친구네는 엄청 부자였다. 친구 엄마는 내게 자주 와서 아들과 숙제도 하고 놀다 가라고 했다. 친구는 잘 사는 데 반해 공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한 교실에 보통 60명 남짓 있었다. 출석 확인도 이름보다 번호를 불렀다. 시험을 보고 나면 담임이 성적을 불러 주었는데 50 등 내외였던 그 친구가 38 등을 했다고 좋아라 하던 생각이 난다. 나는 학창 시절 늘 1, 2등을 다퉜고 3등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친구는 필기구도 고급이고 전과와 수련장이 가득했다. 나는 언감생심이었다. 친구 엄마가 가루를 탄 오렌지 주스와 가끔 과자도 주었다. 그것 얻어 먹는 재미도 있지만 친구 방에 가득한 세계문..

네줄 冊 2020.10.20

새벽 세 시, 나의 바다는 - 윤석산

새벽 세 시, 나의 바다는 - 윤석산 새벽 세 시에 깨어나 잠이 오지 않는다고 무어가 걱정이겠는가. 잠이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뒤척이다가 어질머리로 이제 막 밝은 햇살 퍼져오는 시간쯤 다시 어설픈 잠이 든다고 무어 대수겠는가. 어차피 마땅히 나가야 할 곳도, 보아야 할 일도 없는데 깨어나면 깨어나는 대로, 잠이 들면 잠이 드는 대로 어질머리면 어질머리대로 잠들었다가는 다시 깨어나는 게 이즘의 나의 삶인데 새벽 세 시, 나의 바다는 그만 더 도망도 칠 수 없는 해역에 갇히어, 다만 출렁거리고 있구나. *시집/ 햇살 기지개/ 현대시학사 저녁 9시 무렵의 그 사내 - 윤석산 저녁 9시 무렵 전철 경로석에 앉아 졸고 있는 그 사내 60은 족히 넘었고 그래서 70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나 아직은 가장으로 그..

한줄 詩 2020.10.20

우리의 날갯짓은 정적으로 흔들린다 - 권지영

우리의 날갯짓은 정적으로 흔들린다 - 권지영 눈물 없이 우는 새 한 마리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나는 눈물 없이 우는 법은 익혔으나 하늘을 나는 능력은 아직 없기에 언젠가 새들처럼 하늘을 날게 되면 밀린 대답들들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 마음을 다쳐 말을 잊은 이 시간의 덩어리를 타고 부유한다 새는 날개의 균형과 공기 저항으로 하늘을 난다 바람을 가를 때는 정적을 깨며 산비탈을 가파르게 오르는 기분이다 누군가를 부르며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새 한 마리, 모든 공기를 억누르며 가만히 다정하다 눈물 없이 우는 법을 그때 배웠지 울기 위해서도 균형이 필요해 삶의 중심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게 평형감각을 길러야 해 서투른 나는 이따금 흔들렸지 바람이 거..

한줄 詩 2020.10.20

이름 이후의 사람 - 전형철 시집

전형철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냈다. 2007년에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후 13년 만에 겨우 두 권의 시집을 낸 셈이다. 작품 발표가 무척 더딘 편이다. 허나 등단만 하고 사라지는 시인들이 부지기수인 시단에서 그래도 이 시인은 다행스런 편이다. 시인의 첫 시집인 를 읽으면서 한동안 이 시인에게 푹 빠졌다. 마음에 꽂히는 시집을 발견하면 해부하듯 반복해서 읽으며 파고 드는 편인데 이 시집이 그랬다. 눈으로 들어온 싯구가 가슴에 박혀 빠져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이 시인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두 번째 시집이 파란 출판사에서 나왔다. 희한하지. 신생 출판사에서 이렇게 좋은 시집이 연달아 나오고 인연이 닿는 것을 보면 일종의 행운이다. 이 시집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여전히 슬픔이 배긴 싯구에서 ..

네줄 冊 2020.10.19

울음의 탄생 - 박서영

울음의 탄생 - 박서영 나의 눈동자는 색을 바꿀 줄 안다 앵두나무가 보이는 여관집 방문을 열고 앉아 일렁이는 가로등빛 그늘을 본다 하늘이 울음을 얼려 눈을 내리는 밤이다 족발에 소주 한 병 앞에 놓고 슬픔을 애도하는 밤이다 앵두 한 알 매달지 않았는데도 저 나무는 무겁고 힘들어 눈 쌓인 앵두나무 발목이 젖어 축축해 나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았는데 몸에 울긋불긋 지렁이가 피었다 밖이 어둡지도 않는데 밤이라고 하지 말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생각이 깊어 슬픔이 탯줄처럼 길어지는 사이 순천의 한 여관방에서 분홍색 목젖에 울음이 매달려 흔들린다 한 호흡만 더 건너가자, 생이여 추운 앵두나무를 몸 안에 밀어 넣고 있는 환한 가로등처럼 눈이 녹아내려 드러난 앵두나무 뿌리가 족발처럼 자꾸 보여, 물어..

한줄 詩 2020.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