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마루안 2020. 11. 1. 19:06

 

 

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속을 비운 것들은 나이테가 없다
지나온 저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나이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지운 탓이다

살다 보면
옳다고 잘했다고 동그라미 쳐줄 수 있는 때
과연 몇 번이나 되랴

속을 비운 것들은 나이테 대신
역정을 돋을새김 한다
주름이라는
명징한 장부에


*시집/ 파미르를 베고 누워/ 서정시학

 

 

 



모서리에 부딪히다 - 김일태


화장실 가다 침대 모서리에 정강이가 부딪혔다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어 혼자 투덜거렸다
나이 들어가며 자주 부딪히는 게
책상이나 식탁뿐만 아니다
일상의 각진 데에도 쉬이 부딪히며 잔소리 또한 많아진다
인지능력 떨어지고 건망증 심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아내는 학술적으로 얘기하지만
나는 섣부른 예단 때문이라고 여긴다
촉각이 뽀족할 때는 그런 일 없다가
왜 자주 익숙한 것들의 모서리에 부딪히게 되는지
각진 데에 찔리고 부딪히면서 지금껏 뭉그러져 왔는데
아직 나의 모서리는 더 닳아야 하는지
부딪힐 일 많아 더 각을 세워야 하는지
이제는 더 휘어지거나 펴질 것 같지 않은
생의 변곡점에서
자꾸 각진 데에 부딪히다가 잘못되어 깨지는 건 아닌지
걱정에 날개를 다는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각에 도달한다*고
정강이 통증이 번개처럼 내 몸을 흔들다 간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피스의 글에서 차용




# 김일태 시인은 경남 창녕 출생으로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부처고기>, <바코드 속 종이달>, <코뿔소 사는 집> 등 8권의 시집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가는 바람 - 이병률  (0) 2020.11.02
망원 - 전형철  (0) 2020.11.01
새의 운명 - 백무산  (0) 2020.11.01
슬픈 축제 - 김종필  (0) 2020.10.30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0) 2020.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