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커피 한잔 할까요? - 허영만 만화

마루안 2020. 10. 30. 22:10

 

 

 

나는 영국에서 꼬박 14년을 살았다. 햇수로는 15년이다. 영국에 살면서 맛을 알게 된 음식들이 있다. 치즈, 와인, 초콜릿, 커피, 그리고 빵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커피 외에는 거의 접하지 못했거나 먹어도 드문드문 맛보는 정도였다.

 

빵이야 생존을 위해 먹다가 맛을 알게 되었으나 다른 것들은 그 곳 문화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것이다. 영국에 사는 동안 특히 와인과 치즈에 빠져 살았다. 안 먹는 날이 드물 정도로 거의 매일 먹었다. 저렴한 와인 위주로 마셨지만 말이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영국이지만 와인과 치즈가 엄청 싸다. 와인뿐인가. 빵, 우유, 달걀, 육류, 과일, 야채 등 기초 생활 물가는 영국이 한국의 절반 값 정도다. 특히 양파나 감자, 당근 값은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신토불이라는 말도 믿지 않는다.

 

과일, 야채, 우유 등 한국 식품은 맛이 너무 없다. 한국에 돌아 와서 한동안 과일을 먹을 때마다 맹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달고 짜고 매운 양념 위주의 한국 음식이기에 이런 맹탕 재료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제 커피 이야기를 하자.

 

영국은 홍차의 나라다. 기차를 타면 작은 수레를 밀고 음료를 파는데 많은 영국인들이 홍차를 주문한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홍차는 적응을 못했다. 한두 번 마시다가 적응을 포기했다. 영국도 요즘은 젊은이들이 홍차보다 커피를 더 즐긴다. 

 

런던에는 출근 길 고객을 상대하는 각종 프렌차이즈 커피 매장이 즐비해서 입맛 따라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수퍼를 가도 수십 가지의 인스턴트 커피가 있다. 한두 업체가 독과점을 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내 입맛이 너무 저렴해서 지금도 인스턴드 커피를 즐긴다.

 

손님 접대 할 때 빼고는 아주 드물게 비싼 커피를 마신다. 천성이 싸구려 취향이어선지 와인도 구별 못 하고 커피도 잘 구별을 못 한다. 입맛뿐 아니라 일상에서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겉멋이다. 내 싸구려 취향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편하다.

 

이 책은 허영만 선생의 만화다. 식객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나는 진중하게 보질 않았다. 그러나 이 만화는 아주 꼼꼼하게 읽었다. 오래도록 허영만 선생과 함께 작업을 한 이호준 작가의 글 때문일까. 인간적인 따뜻한 이야기가 가슴에 다가왔다.

 

커피 매장 2대커피 주인장 박석과 그 아래서 일하는 강고비가 사연을 이끌어간다. 일본 만화 심야식당처럼 매 회차 등장하는 인물과 함께 커피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사는 신촌 옆동네에 2대커피의 실제 모델이 된 커피집이 있는데 두 번 가 봤다.

 

이 만화는 여러 권인데(3권까지 읽었다) 2권에 스페셜티 커피가 나온다. 엘살바도르 산타아나 지역 핀카 킬리만자로 농장에서 재배한 케냐 SL-28 품종이다. 재배 고도는 1450m다. 스페셜티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이 정도의 설명이라면 와인 뺨친다.

 

내가 영국에서 제일 저렴한 와인을 마셨듯이 한국에서도 900백 원짜리 커피를 자주 마시는 나같은 사람은 이런 설명에 기가 죽는다. 그렇다고 커피 한 잔 가격이 6천 원이라며 펄쩍 뛸 필요는 없다. 이 만화에서 그 만한 가치가 있음을 자세히 설명하고 설득이 되기 때문이다.

 

저렴한 취향을 위해 22화에 감동적인 장면도 나온다. <봉지커피와 삶은 계란>이다. 가난한 어느 할머니가 진료도 받지 않으면서 매일 동네 치과를 간다. 로비에 비치된 봉지커피를 공짜로 마시기 위해서다. 창구 직원의 눈치와 구박은 상관 않는다.

 

갈 때는 비치된 커피를 한주먹 주머니에 넣어 간다. 치과 원장이 완전 보살이다. 커피 훔쳐간다고 구박하는 직원을 되레 타이른다. 그까짓 봉지 커피값 얼마나 한다고 야박하게 하냐며 되레 커피 상자가 비면 바로 채워놓으라며 할머니 편을 든다.

 

원장은 할머니와 봉지 커피를 함께 마시며 말 동무를 해주기도 한다. 이런 사연이 만화에서나 나올 법하지만 마음이 훈훈해지는 이야기다. 인간적인 따뜻함이 허영만 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공짜 커피를 마시고 명언 하나를 독자에게 남긴다. "자기 작품에 감동하면 3류 작가래요" 바리스타도 예술가도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