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달이 떠서 기뻤다 - 박구경

달이 떠서 기뻤다 - 박구경 다 감 농사 잘 지은 마을 사람들 덕이다 커다란 다라이에 작은 달들이 가득 담겨 있다 구름이 걸린 것처럼 작은 달 하나에 감잎을 달아 놓은 것이 화가의 마음이다 달 하나를 깨물어 달의 씨 속에서 오래 전에 놀던 숟가락을 보니 달 따다 다친 이도 달 따다 벌에 쏘인 이도 그만 어려져서 열 살 적 얘기를 하고 일곱 살 시절이 가로막아 가며 타작마당에 그 무슨 기운이 굴러다닌다 이게 다 감 농사 잘 지은 마음 덕이다 달상자를 트럭에 가져다 싣는 택배 총각 주소와 전화번호를 연달아 묻는다 달에게 달을 닮은 사람들에게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노무현을 추억하다 - 박구경 1 저 환한 들판에 이따금 그가 들르면 삐딱하게 기운 자전거 위에서 밀짚모자 건들멋으로 쓰고 발 ..

한줄 詩 2020.10.28

비둘기 일가 - 손택수

비둘기 일가 - 손택수 건물 외벽을 뚫고 나온 온풍기 연통이 비둘기들의 횃대로 바뀌었다 연통 아래 묵은 신문이 깔려 있다 시어머니 똥수발만 일곱 해를 했는데 비둘기 똥수발까지 한다며 오늘도 신세한탄을 하는 여자 어찌 된 세상인지 비둘기들도 피똥을 싼다고, 아침마다 신문 기저귀를 간다 피똥은 나도 싸봤다 발목을 절룩거리며 길바닥을 쪼는 부리질 따라 날갯죽지 퍼득거려도 봤다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새는 새라고 더 다가오지 말라 퍼들쩍 틈을 벌리고 알량한 한 뼘 틈으로 겨우 나를 달래도 봤다 늙으면 괄약근이 먼저 풀어진단다 너희 아비도 화물을 지고 계단을 오르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있었어 버린 속옷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오던 것 기억나니 가신 아비 생각에 착잡하게 담배를 무는 베란다 어느 횃대 아래 어깨..

한줄 詩 2020.10.28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오면 - 김인자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오면 - 김인자 내 할머니가 가고 내가 왔듯이 내 어머니가 가고 내 아이가 왔듯이 내가 갔을 때 내 손자가 오는 일처럼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온다는 말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온다는 말 따듯해서 좋다 여름이 반 가고 겨울이 반 온 자리 구절초 언덕으로 소풍 나온 이 가을도 첫 밤처럼 다정하니 좋다 참 좋다 더러 생각지도 못한 곳에 급류가 기다릴지라도 강물은 그렇게 흘러갈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가을이 짧아야 하는 이유 - 김인자 농로를 따라 산 중턱으로 향한다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은 따사롭다 비탈밭에선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와 늦감자를 캐는 사람들이 새참 중이다 이 산골까지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 보인다 묻지도 않았는데 고향이 방글라데시 다카..

한줄 詩 2020.10.28

들국화는 피었는데 - 김재룡

들국화는 피었는데 - 김재룡 총알은 왼쪽 등 뒤에서 견갑골을 부수고 겨드랑이 동맥을 끊으며 야전잠바 윗주머니를 뚫었다. 제3야전에서 7일이 지난 후에야 59후송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총상은 총창이 되어 썩어들어 갔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데. 환부에서 죽음의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한 달 넘게 버텼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며 이름을 불렀을까. 둘 지난 아들. 아 아내. 옹진 강령 땅. 3.8선이 생겼다는 두락산 돌모루에서는 아래쪽 두 사람이 조선낫에 찍혀 죽었다고 했다. 대신에 까치산 말뚝이고개 너머 며느리바위에서 위쪽 사람이 도끼로 목이 잘렸다는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몇 번씩 자기의 목을 어루만졌다. 음력 오월 초열흘. 유월 이십오일. 둘째 형이 휴가 나왔다 귀대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전쟁이 터진..

한줄 詩 2020.10.28

돌이킬 수 없는 - 윤의섭

돌이킬 수 없는 - 윤의섭 ​ 예문이지 아주 평범한 성장기를 거쳤다는 것부터 단칸방을 전전했다는 것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고 한때 성냥갑과 레코드를 수집했다는 정도 지독히 가난했고 잠깐 풍요로웠고 웃으며 슬펐고 슬퍼하며 슬펐고 보이지 않아 미칠 뻔했고 미칠 것 같아 찾아 헤맸고 오늘은 끝장을 내고 말겠다 오늘은 못 하겠다 다짐하다 미루다 여기에 이른 빈약한 연혁 위는 누군가의 인생을 축약해 놓은 글이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 올바로 고치시오 예시일 뿐이지 별로 어렵지 않은 자막처럼 단풍 진다 자막처럼 달이 뜬다 꽤 오랫동안 낯선 풍경의 길 위에 서 있다는 생각 무수한 언덕을 넘어왔으나 그것은 누군가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마지막 언덕은 내 무덤이길 가녀린 들꽃과 마주쳤지만 인사를 나눈 것도 같아 너..

한줄 詩 2020.10.27

접속사 - 정진혁

접속사 - 정진혁 그리고를 손에 들고 조금 울었다 눈 코 입을 기억하는 일은 슬펐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보다 더 질긴 접속사를 남기고 갔다 도처에 상처는 늘어나고 그 흉터마다 접속사 하나씩 자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가난은 적절한 접속이었고 그러므로 가난은 간절한 접속이었다 왜냐하면 덮고 잠을 청했다 어떤 밤도 오지 않았다 상처는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늘 우리 곁에서 영역을 넓혔다 미루나무 끝까지 접속을 밀어 올리기도 하고 고양이의 눈 속에서 그런데를 찾아내기도 하고 빨랫줄에 더구나를 말리며 변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언저리만 흔들릴 뿐 물려주고 간 것이 접속사인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접속이 안 되는 생 속에서 나는 그러나 추잡한 속셈의 기다림일 뿐이고 그래서 알아야 할 것보다 좀 더 많..

한줄 詩 2020.10.27

무연(無緣)사회 - 배정숙

무연(無緣)사회 - 배정숙 손전등만한 빛이면 족합니다 무릎 밑으로 찬바람이 스미는 날 함께 늙은 누렁이가 한발 앞서 불안 쪽으로 다가갑니다 오로지 누렁이 외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녹내장 때문이라 믿습니다 두 눈에서 주르르 흐르는 외로움은 녹내장이 악화되어서라고 믿습니다 한 달에 스무날은 병원 대기실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나무 밑 빈 의자에 앉아 북망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로 보냅니다 봄은 키우지 않아도 잘 자라고 여름은 돌보지 않아도 씩씩하여서 가을은 스스로 성숙했습니다 하지만 겨울과의 경계가 젊음보다 훨씬 두텁다는 것을 터득하는데 생의 대부분을 써버렸습니다 비로소 슬하가 허전합니다 그냥 막막하게 밤을 끌어당겨 눕습니다 다시 새벽과 마주할지에 대해서 마음 쓰지 않기로 한 뒤부터 아랫목에다 울음..

한줄 詩 2020.10.27

현금 인출기 - 전영관

현금 인출기 - 전영관 판로도 막힌 희망 따위를 양식해보다가 하늘로 방생해버린다 천국의 문 앞에 모여 있겠지만 희망과 가능성은 좌우가 같은 슬리퍼 변기로 걸음을 뗄 때에나 신는 것 하루는 예후도 나쁜 질병 양쪽으로 빤하게 분리될 것 같은 절취선을 따라가는 느낌으로 시계를 본다 불안에 대한 저작권은 없지만 해적판처럼 남용되는 것들이라서 몰수하고 싶다 불면 불운 불쾌 등 돌림자 형제들의 판촉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수면으로 올라와 숨쉬는 고래가 된 것 같다 숨을 오래 참는다면 그리운 사람이 없다는 증거다 부르튼 입술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주둥이가 헐어버린 횟집 수족관 우럭을 떠올렸다 최선을 다해 절망했겠지 다시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먹구름이나 치워주는 일을 하고 싶다 책임지는 것 외엔 무능한 가..

한줄 詩 2020.10.23

몽골에서 쓰는 편지 - 안상학

몽골에서 쓰는 편지 - 안상학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

한줄 詩 2020.10.23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봄날

이 책은 성매매 여성의 이야기다. 출판사로부터 도움을 받았겠지만 본인이 직접 썼다. 몸 파는 여자. 흔히 창녀라고 부른다. 그래서 본명이 아닌 봄날이라는 가명을 썼다. 20년 동안 몸을 팔았다. 작가의 글발에 놀아나는 어떤 소설보다 흥미롭게 읽었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저자가 불분명한 책이 부지기수다. 독립 출판이 특히 그렇다. 언론 기자가 실명과 자존심으로 책임 지는 보도를 해야하듯 책도 마찬가지다.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심지어 정체성마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 책은 성매매 여성이어서 가명임을 이해하고 읽었다. 성매매 여성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다고 한다. 몸을 파느니 차라리 마트에서 일을 하던지 식당에서 서빙을 해도 먹고 살 수는 있지 않느냐, 뭐 이런 얘기다. 그 말에는 편하게 돈 벌려고..

네줄 冊 2020.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