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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표 - 서정춘

기러기표 - 서정춘 나는 안다 아웃집 옥탑방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양말 한 짝이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릴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진 양말짝에 기러기표 부표를 달아주면 구만리장천으로 날려버릴 바람이 불어올 것을 *시집/ 하류/ 도서출판b 11월처럼 - 서정춘 전설 같은 노래라지 딸기 먹고 딸을 낳고 고추 먹고 아들 낳고 희망일기 쓰면서 흥흥거렸지 시간농사 지으며 흥흥거렸지 바야흐로 끝물 전에 도둑맞듯 아들 딸 남의 손에 얹어주었지 돌아와, 아내와 나 의지가지 작대기로 남게 되었지 11월처럼 #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1968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 , , 가 있다.

한줄 詩 2020.11.16

독립출판의 왕도 나의 작은 책 - 김봉철

얼마전에 헌책방에서 이 사람의 책을 처음 만났다. 다. 내 인생이 저렴하기 짝이 없는 삼류 인생이라 이런 책 제목이 눈에 더 들어온다. 책의 외관이 다소 성의 없어 보였지만 제목 때문에 읽은 것이다. 오래전에 일기처럼 끄적거린 내용인데도 공감이 갔다. 대번에 외로움 타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글을 읽으며 몇 가지 촉이 왔다. 김봉철도 본명이 아니겠구나. 사연도 조금 각색을 했겠구나. 인연이란 게 묘해서 몇 달 후에 헌책방에서 를 발견했다.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제목 보고 골랐는데 김봉철의 책이다. 책도 내용물도 조금 세련된 느낌을 받았다. 픽션을 보탰겠지만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글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서점 신..

네줄 冊 2020.11.15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황동규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황동규 가을이 너무 깊어 갈수록 철 지난 로봇처럼 되는 몸 길이나 잃지 말아야겠다. 길이라니? 버스와 전철 번갈아 타고 걸어 서촌보다 더 서쪽 동네 가게에 들러 맥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인왕산 서편을 달관한 로봇처럼 천천히 걸으리. 빈 나무에 단풍 몇 잎 떨어지지 않고 모여 가르랑대고 있다. '이제 말 같은 건 필요 없다. 가르랑!' 로봇도 소리 물결 일으킨다' '평생 찾아다닌 거기가 결국 여기?' 그래, 내고 싶은 소리 다들 내보게나. 숨 고르려 걸음 늦추자 마침 해 지는 곳을 향해 명상하듯 서 있는 사람 하나 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로봇이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거리 두고 나란히 선다. 흰 구름장들 한참 떼 지어 흘러가고 붉은 해가 서편 하늘을 뜬금없이 물들이다 무..

한줄 詩 2020.11.15

무서운 안부 - 이철경

무서운 안부 - 이철경 술 취해 뒷골목 화장실 찾다가 열어젖힌 후미진 주점 소우(少雨) 홀을 지키는 마담은 서너 번 바뀌었지만 젊은 날 손님이 장년의 손님이 되어도 부르던 노래는 여전하다 협소한 주점 안, 대여섯이 다닥다닥 마주 앉아 처음 본 손님들이 노래하다 술잔을 부딪치며 명함을 교환하던 곳 일어서면 부딪힐 것 같은 낮은 천장엔 세계 각국의 지폐가 노랫가락에 춤추던 곳 방음 효과로 토굴같이 허름한 아지트엔 고성도 불편치 않다 청승맞은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르며 취해 가던 그날들, 불온한 시절에도 하찮은 애인과 간간이 들렀던 소우, 다시 가 보고 싶다던 친구가 세 번째 뇌수술 들어갔다는 소식 후 연락이 끊겼다 주점에 앉아 노래 따라 부르다 세 번째 수술 후 연락이 끊긴 그의 안부가 무섭게 궁금한 밤이..

한줄 詩 2020.11.15

비문증 - 류성훈

비문증 - 류성훈 나는 흙먼지처럼 왔으니 저녁이 혼인비행처럼 능선을 넘는 것을 본다 이불 속에서 평생 나오지 않을 듯 버스를 따라 우리는 동면놀이하러 가자 붉은 구름에 감기는 바람들을 손등으로 짓이기는, 벌써 저무는 눈꺼풀들을 비벼 보면서 바람이 흙먼지를 데려올 때 홍채는 눈을 가누지 못하고 정류소는 늘 성가신 하교를 기다린다 눈부터 저려 오는 저녁들은 앓아야 할 아픔도 주워 들 그리움도 없어 유감인 건 혈압도 간 수치도 아닌 날파리 떼마저 피해 가는 길 아무도 아무에게도 열병이 되지 않는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보이저 1호에게 - 류성훈 물통 속에 밤이 퍼진다 내 붓은 차갑게 씻기고 안부라는 건 대개 꿈풍선일 뿐, 눈부신 우주 방사선 속에서 버릴 꿈이 없어서, 널 닮은 연체동물을 그렸다 저..

한줄 詩 2020.11.15

11월 28일, 조력자살 - 미야시타 요이치

2018년 11월 28일, 다계통 위축증(MSA)을 앓던 50대 일본 여성 고지마 미나가 스위스 바젤에 있는 에서 숨을 거둔다. 라이프서클은 스위스 의사 가 만든 단체로, 지난 2011년 설립된 이래 매년 약 80건의 안락사를 진행해왔다. 이 책은 제목만 보면 언뜻 소설처럼 생각 되나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가 쓴 책이다. 2018년 8월 미야시타는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다계통 위축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고지마 미나가 보낸 편지다. 자신의 병을 잘 알기에 병세가 더 악화되기 전에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에 가서 죽고 싶다는 편지였다. 다계통 위축증이라는 병은 진행성 질병으로 몸 안의 근육이 점차 쇠약해지다가 죽음을 맞는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결국 침도 삼킬 수 없..

네줄 冊 2020.11.12

이력 - 김유석

이력 - 김유석 싸락눈 몇 됫박 들판에 안치는 저녁이다. 작년에 끌고 간 줄 토막토막 끊어 오는 기러기 울음 굴핏한 어스름. 부메랑 날갯죽지들 붐비는 공중을 바라보며 한 철 들러 갈 것들에게 또다시 가슴을 앗긴다. 어느 추운 고장의 습속일까, 바닥을 짚기 전 몇 번이나 파닥거리는 뜨내기들. 제 기척에도 놀라는 것들은 저런 식의 설은 기억법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곳 정들지 못하고 떠도는 것일 게다. 공중을 건널 때와 바닥에 내리는 울음이 설핏 다름을, 가뭇없는 작은 애비 기별인 냥 초저녁잠 설치는 서당집 노모 가는 귀 섧도록 주인 바뀐 논배미에 주둥이를 박고 우는 것들의 발목이 붉다.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십일월 - 김유석 새들이 왔다. 그 전날, 먼 이역 순회공연을 돌아온 가수의 쉰 목처..

한줄 詩 2020.11.12

노을에 기대어 - 성선경

노을에 기대어 - 성선경 가을의 단풍을 보려거든 그 자태만 볼 게 아니라 그 아득함을 보아야 하리 저녁의 노을을 보려거든 그 붉음만 볼 게 아니라 그 막막함을 보아야 하리 수령이 사백 년이라는 고향 어귀의 두 그루 은행나무와 두 그루 느티나무가 단풍 들었다 아득하게 막막하게 단풍 들었다 저녁노을도 곱게 단풍 들었다 아버지 가신 지 꼭 일곱 달 만이다. *시집/ 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파란출판 11월 - 성선경 다시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노래여 그리움 목메이게 마음껏 붉어라 나는 지금껏 돌아가고 싶은 그날이 없어 내 흰 머리칼은 단풍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서슬 푸르던 세상의 잎들이 노랗게 빨갛게 물이 들 때 노래도 사랑도 낙엽처럼 다 잊히는 이미 한 해도 다 지난 옛일 이제 내 마음..

한줄 詩 2020.11.12

겸상 - 전영관

겸상 - 전영관 절름발이 연인의 걸음에 맞춰 걷듯 천천히 꾸준히 오는 저녁 나이든 남자의 눈물처럼 잠깐이지만 세상이 무거워지는 가을비 일기예보가 정확히 맞으면 안심되다가 두려워진다 밀려드는 어둠을 밀치고 방안을 지켜내는 형광등이 힘겨워 보인다 아내가 미소 지을 때마다 이 별 어딘가에서 목화가 푹신하게 피어날 것이다 매달려 버티다가 가을비 핑계 삼아 못 이기는 척 흙으로 돌아오는 이파리의 나날들이다 밥벌이 때문에 가장이라는 버스가 되어 과속했다 갓난쟁이 아들 둘을 태웠는데 청년이 되면 내릴 것이다 습성인지 의자가 비었는데도 한동안 노선을 돌았다 김치부터 된장을 거쳐 토닥이는 도마 소리까지 아내의 저녁 준비 속도에서 살림이 늘던 때를 생각한다 거쳐온 모퉁이들을 돌아본다 영혼에게 안부 건네듯 겸상하며 평생의 ..

한줄 詩 2020.11.12

건강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드디어 배신 시리즈가 또 나왔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늘 좋은 책을 낸다. 예전에 읽은 노동의 배신은 추천하고 싶은 명저다. 그 외 희망의 배신 등을 써서 나를 매료시켰다. 이 책도 좋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힘은 저자의 문장력에 있다. 문학적인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이다. 교양서란 바로 이런 책이다. 내용, 디자인, 적당한 책값 등이 잘 조화를 이뤄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저자는 1941년 미국 출생의 여성 작가다. 세포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도시 빈민의 건강권을 옹호하는 NGO에서 일하다가 전업 작가로 나섰다. 신자유주의 시대 빈곤 문제를 다룬 노동의 배신을 시작으로 사회 곳곳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명저를 남겼다. 있는 자, 가진 자, 배부른 자에겐 두려운 저격..

네줄 冊 2020.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