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공명음 - 박미경

마루안 2020. 10. 29. 19:18

 

 

공명음 - 박미경


문을 닫은 지 이십 년 훌쩍 지난 정미소
환삼덩굴 덮어쓰고 도깨비 풀밭에 주저앉았다

한 뼘은 족히 넘는 벨트가 바닥에서
천장으로 흐룰흐룰 몇 바퀴 돌고 나면
소에 떨어지는 물처럼 졸졸
포대기 속으로 흰쌀이 흘러들었다
나무 소리도 쇳소리도 아닌 음
귀를 막고 올려다보면
엉성한 양철지붕과 시멘트벽 사이
활모양의 틈으로
먼지는 반짝이며 날아가 햇살이 되었다
늦가을 아랫마을 사람들까지 복작거리며
옆 작은 방앗간에서 쌀가루 고춧가루를 빻기도 하던
정미소에는 텔레비젼도 있었다

세상일에는 꼭 절정이 있어야 했을까
강가에 놀러 갔던 정미소 아들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삼십 리 밖에서 발견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 살기 싫은 아픔 존재한다는 것을
그해 정미소 벽 담쟁이 붉게 물들어
접근금지 목책을 그으며 말라갔고
정미소 기색을 살피며
마을 사람들 조용히 기다렸지만
정미소가 멈췄다

공명음 빈 들판을 울린다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경계​ - 박미경


고향 마을에 바람이 사는 곳집이 있었다
강변 가는 길 중간이었는데
돌과 흙을 비벼 만든 굴뚝 없는 낮은 기와집
바람이 다니는 한 뼘 구멍이 두 개 있고
서쪽의 낮은 나무문은 항상 잠겨 있었다
이승을 떠나지 못한 죽음 웅크리고 앉아
흙바닥을 긁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던

엄마 이승 떠실 때
집 안팎으로 붉 밝혀 동네가 환하고  
꽃상여 마을 안을 지나 살구목지로 올라갔다
그날 뒤
상엿소리와 상여의 목인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담 넘어오는 감나무 그림자조차 무서워 
이불 밖으로 내놓은 손과 발을 안으로 숨겼다
고향 떠나올 때
곳집 흙벽, 바람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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