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의 운명 - 백무산

마루안 2020. 11. 1. 18:56

 

 

새의 운명 - 백무산


알에서 깨어나 처음 거두어준 손길을
어미로 알고 일생 한 사람을 따르는 새들이 있다지만

태어나 누구보다 일찍 내 곁에서
울어준 새 한마리를 나는 어미로 따르고 있네

홀로 깨어나던 백색의 여름 낮
현기증에 눈도 뜰 수 없던 그 새하얀 마당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쟁쟁 내 귀를 파먹으며 울던 새

하던 일도 놀던 일도 다 털고
따라나서게 하던 그 울음소리

그를 따라 험한 곳으로 가파른 곳으로
다리가 부서지고 피투성이 되기도 했네

내게 젖꼭지 대신 좌절을 물려주고
안아주던 대신 버려졌음을 알게 했네

날개도 발도 낳아주지 않았고
언제나 내게 허기를 물려주던 새

견딜 수 없어 그를 떠나려고 했네
모든 불행을 안겨준 그 소리에 귀를 막았네

그러나 잠시뿐 어느날 문밖에
그 소리 찾아왔네 나의 어린 새끼가 되어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안락사 - 백무산


젊은 여인이 별다른 이유 없이
안락사를 요구한다는데
어렸을 때부터 삶은 자신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간이 서늘해졌다네 그 한마디에 그리고
내 생각을 들켜버린 듯해서

내게 맞지 않는 삶을 벗어버릴 수 없어
나를 벗어버리려고 발버둥 쳤지
내게 오는 것들을 조금씩 죽여서

내가 애써 마련한 옷을
벗어 내다버린 것도
팔자 필 제안을 받았다가 금방 귀를 닫아버린 것도
간절함으로 애써 쫓아가
잡았던 사람을 그냥 놓아버린 것도

어울리지 않아서였지 나와
내가 그쪽에 어울려보려고 노력할수록
나에게서 멀어진 짓들

내가 벗어버린 것들은 다름 아닌 내가 매일 나에게 가하는
안락사였지만

나에게는 오늘도 하나 이상의
감당 못할 목숨이 새로 피어나서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원 - 전형철  (0) 2020.11.01
주름에 관한 명상 - 김일태  (0) 2020.11.01
슬픈 축제 - 김종필  (0) 2020.10.30
한때 저녁이 있었다 - 천세진  (0) 2020.10.30
지는 사랑 - 권혁소  (0) 2020.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