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사랑 - 권혁소
낡아보니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만큼만 사랑을 할 뿐 그런 건 없다, 하물며
이제 막 헤엄치기를 마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그대에게야
말해 뭣 하겠는가
사랑을 잃고 시를 얻다니,
이런 행위가 삶을 경외하는 마지막 자세라고
슬픈 자위를 해보긴 하지만 더 많은 상처를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휘파람을 불어주는 일도 버겁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이 저문다
숨자, 어느 숲에든 몰래 들어가
조용한 바람에도 격하게 이파리를 떠는
관목(灌木)이라고 되자, 그대와 나
비록 실패하는 사랑에 매진했으나 아직
세상엔 못다 한 사랑이 많이 남았으니
사랑이 진다고 싸움을 부를 일만은 아니다
저무는 일, 때로 고요할 따름이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늙은 개 - 권혁소
나에게로 와서 늙은 개 한 마리 있다
도시의 낯설고 후미진 골목을 배회하다가
어린 손주를 두고 황망히 길 떠난 엄니 대신 왔을까
딱 하루만, 단서를 달고 너는 우연처럼 왔다
딱 하루가 십오 년을 넘는 사이
이빨도 귀도 눈도 어두워진 늙은 개
안위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
손으로 슬쩍 건드려야만 천천히 고개 들어
나 아직 살아 있다고 몸짓하는,
오직 후각 하나로 삶을 지탱하는 개
정치인 욕할 때 개만도 못 한 놈이라 했던 말을 사과한다
하여 턱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어떤 헌사 같은 것
집을 비우는 아침마다 주문을 반복하게 하는 늙은 개
네 나이를 사람 나이로 환산하여 측은해 하지 않으리
나에게로 와서 함께 늙어가는 개 한 마리
나의 목덜미도 어루만져다오, 나 죽거든
# 권혁소 시인은 1962년 강원도 평창 진부 출생으로 1984년 <시인>으로 등단했고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논개가 살아온다면>, <수업시대>, <반성문>,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 <과업>, <아내의 수사법>, <우리가 너무 가엾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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