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 황동규

마루안 2020. 12. 29. 19:43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 황동규


집을 나서자마자 방금 나온 방이 생각나는
2018년 12월 28일 아침,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 18도.
두툼한 모직 라이닝 댄 코트 입고 나섰어도
곧장 몸에 달라붙는 추위.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 후들후들 떨기 시작하다 버스에 오른다.
안경이 흐렸다가 갠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그래, 다른 감각들도 눈 감았다 뜨고 감았다 뜨곤 했으면!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예기치 않던 향내 방 안에 은은하다.
살펴본다.
아 한란!
그동안 물 잘못 주어 여러 난 죽인 텔레비 옆자리에 앉아
며칠 전 선물로 들어온 난이 막 향내 풍기고 있다.
나는 한란 자주 죽이는 사람,
지금 꽃 피운 곳이 죽음의 자리인 걸 모르고,
깊은 숨 몇 번 들이쉬니
창밖 저 아래 밀어논 눈 더미가 내려다보인다.
참샌가, 조그만 다갈색 새 하나
그 앞에서 땅을 쪼고 있다.
그 뒤에 한 마리, 그 뒤에 또 한 마리,
저녁 햇빛 속에 앙증스레 땅을 쪼고 있다.
눈 돌렸다 다시 보니 셋이 머리 서로 맞대고
고래 까딱까딱 함께 땅을 쪼고 있다.
간질간질 정답다.
그렇지, 한란,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진한 노을 - 황동규


태안 앞바다를 꽉 채운 노을,
진하고 진하다.
몸 놀리고 싶어 하는 섬들과 일렁이려는 바다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진하다.
배 한 척 검은색으로 지나가고
물새 몇 펄럭이며 흰색으로 빠져나온다.
노을의 절창,
생애의 마지막 화면 가득 노을을 칠하던 마크 로스코*가
이제 더 할 게 없어! 붓 던지고
손목동맥에 면도날 올려놓는 순간이다.
잠깐, 아직 손목 긋지 마시게.
그 화면 속엔 내 노을도 들어있네.
이제 더 할 말 없어! 붓 꺾으려는 나의 마음을
몇 번이고 고쳐먹게 한 진한 노을이네.


*Mark Rothko. 라트비아 출신 미국 화가. 자살하기 전 그의 마지막 그림은 화면 전체가 노을이다.

 

 

 

 

*시인의 말 

마지막 시집이라고 쓰려다 만다. 
앞으로도 시를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집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이 
내 시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자.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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