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누구일까 - 강신애

마루안 2020. 12. 29. 21:40

 

 

누구일까 - 강신애


새벽 세 시, 요란한 사이렌 소리
화재가 발생했다고
어서 대피하라고
안내 방송이 주민들을 흔들어 깨운다

불에 데인 듯 일어나 현관문 여니
층층 아파트 주민들 얼굴이 풍선처럼 떠서
어디야, 어디야,
소스라친 입김들 주고받고 있다

참 이상한 일
연기 한 오라기 없는 맑은 어둠
쿵쿵거리는 심장에 들이붓는 싸늘한 공기뿐

추운 낭하 끝까지 둘러보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웅성거림이 잦아드는 어디선가
불의 커튼이
천장을 깨고 이웃집을 넘어 유리창을 핥고 있을 상상에

이른아침, 화재경보가
복도에서 피운 담배 연기를 감지한 거라는 방송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누구일까

한겨울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가슴에 들어찬 허기
하얗게 피워올려
꿈결에 든 모두를 불러모은 사람은


*시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팬데믹 - 강신애


닿을 수 없는 차가운 침상에
봄이 숨결을 다 쓴다

마스크 쓴 구름이 홀로 간 자들을 조문하는 동안
창궐한 전염병이
수백만 생명을 구했다고도 한다

바이러스와 테러리스트와 이산화질소 중
어느 것이 견딜 만한가
어디에 산소호흡기를 댈까

우리는 오랫동안 독을 먹고 살아왔는데
기침 소리에 소스라치는 어두운 골목
하얀 얼굴이 라일락 향기를 휘젓는다

나는 숙주고
너는 에어로졸이야

익사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꽃가루야

늙은 쥐에서 임신한 고양이로 불안을 숨기고
뿔뿔이 흩어진 동굴을 봉쇄하니
푸른 하늘이 열렸다

서로 다가가지 말라는 계시처럼

교회에서 극장에서 터미털에서
시취(屍臭)가 빈 의자를 징검다리 건넌다

인류의 대멸종인 듯
쌓이고 쌓이는 시체들
맨땅에 묻혀가는 자들은 영혼의 행방이 묘연하다

사람 없는 길을 간다 나만 밟으며

재가 정지된 시간 위에 뿌려지고
매연과 무증상이 이어지면
벚꽃을 놓친 모퉁이를 오물거리는 개미들의 그늘에서
다시 기침을 해도 될까

쓸어엎고 생겨나는 우주의 주술을 해석할 수 없으니
타인의 죽음으로 연명해야지

 



*시인의 말

역병도
천지에 보태주는 것이 있으려니

새 울음, 마른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처음 만나는 언어 같다.

애착에 겨운 질문들
모래알 같은 말들을 머금고 머뭇거리던
위안과 허망을 멀리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