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허기에 대한 단상 - 이철경

마루안 2020. 12. 28. 21:41

 

 

허기에 대한 단상 - 이철경


삶은 돼지비계처럼 비릿하거나
잔칫날 적선한 돼지비계처럼
고소하기도 하였다
기름기라곤, 마을 잔치 외에는
들어찰 리 만무한 위벽은
귤껍질처럼 얇았다

그 얇은 풍선에 기름을 부으면
어김없이 부글거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위 속,

섬모의 기름기마저
깨끗하게 쓸려 나왔다

그날은 돼지가 일 년에 한두 번
요단강 건넌다던 설이나 한가위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내력 - 이철경


나쁜 시력도 집단생활을 청산한 후에야
안경을 맞출 수 있었듯
유년의 단체생활은 지병을 만드네
종일 노동에 시달리던 시절,
일을 마친 후 강가 멱 감다가
어린 나이에 한쪽 귀를 잃은 후
난청과 이명은 나의 삶

몰려오는 파도에 터지기도
뺨 맞은 타격으로 터지기도
비행 중 기압에 터지기도
그럴 때마다 고막이 뚫리고 재생되길 수차례
참 많은 우여곡절의
수난사를 내 귀는 기억하네

잦은 이명과 어지럼증은
피곤할 때마다 흘러내리는 귓속의 눈물
사는 건, 고통을 안고 상처를 핥으며
아무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내는 것이라 하네
생채기를 내는 이물질이
세월 흘러 진주가 될 때까지
고통이 찬란한 빛을 발할 때까지

 

 


# 이철경 시인은 1966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강원도 화천에서 성장했다. 서울과학기술대 전자공학과,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계간 <발견>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목포문학상 평론 본상과 2012년 <포엠포엠> 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 <한정판 인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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