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월요일 - 홍지호

마루안 2020. 12. 28. 21:23

 

 

월요일 - 홍지호


처음은 자꾸 지나간다
관대한 척을 하면서
키스가 있었다
하루종일 숨을 쉴 때마다
당신이 숨쉴 때 나는 냄새가
들락날락거렸다
바퀴가 터진 스쿠터처럼
처음은 지나갔고 이제 키스를 해도
당신의 숨이 들락거리지는 않는다

처음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자꾸
처음이에요 라고 말하게 되었다
처음이라고 하면 선생이 되어주니까
선생이 늘어가고
미숙함을 이해해주었다
초범이라는 단어가 형량을 줄이는 것처럼
데뷔작을 태워버리고
차기작을 발표한 작가가 있다면
그리워하겠지
형량은 늘어날 것이다

찾고 있던 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나를 만든 건 처음이지요?
세상을 만든 것도 처음이지요?
그러면
봐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토요일 - 홍지호


친구야 너는 육손이였지
친구들에게
여섯번째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보여줄 때
나는 너의 흉터가 부러웠어 친구들의 눈동자와
여섯번째 상상력과

기차를 타면 자꾸만 풍경이 지나간다
풍경은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귀밑에서 손가락이 만져졌지

친구야 너는 토요일에 죽었지
다른 친구들의 눈동자가
너의 사인(死因)을 자살이라고 적을 때
나는 추락사라고 쓰고 있다

어떤 책에는 신이 인간을
여섯번째 날에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섯번째 날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꾸 돌아다닌다
지나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신의 손가락 개수가 궁금했었어
그건 쓰여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가 육손이였으면 좋겠다
여섯번째 날에 세어볼 수 있게

너처럼 잘라버렸다면
상상으로라도 아플 수 있게

네가 잘라버린 손가락을 무의미라고 부를 때
나는 말해주지 못했다
무의미는
무의미한가

친구야 오늘은 토요일이야
너는 토요일을 셀 수 있었지
내일은 무의미한 예배를 드리자

귀밑에서 자꾸 의심이 자란다

 

 



*시인의 말

어떤 땅에서는 걸을 때마다
개미들이 죽었다

쓰고
지우지 못한 문장들과

지워지는 방식으로 웅성거리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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