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주의 행복을 누린다는 건 - 권지영

마루안 2020. 12. 30. 21:43

 

 

우주의 행복을 누린다는 건 - 권지영


이른 아침에 일어나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
자는 아이의 감은 눈과 입술, 볼에 입맞춤을 하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

차가 많은 도로를 벗어나 길가 양옆으로 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하늘거리는 이파리를 늘어뜨린 나뭇가지의 질긴 생명력을 바람으로 느끼는 것.

흙이 틔우는 풀과 시절 꽃망울들의 맑은 인사를 받는 것.
파스텔톤 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 잠시라도 어디에 있는지를 잊게 되는 것.
무더위 피하여 그늘진 곳에서 숨 돌리는 것.
어둠이 내려와 두 다리를 뻗어 쉴 수 있는 시간 속에서 평화로운 밤을 맞이하는 것.

밝으면 밝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맞이해주는 친구가 곁에 있는 것.
거리낌 없이 나누는 차 한 잔과 산책, 떠나고 돌아오는 여행으르 통해 삶에서 만나게 되는 아름답고 자연스런 오늘.


*시집/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달아실출판사

 

 

 

 

 

 

소풍 가는 날 - 권지영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충무로를 걸었다
청계천의 짙어지는 물속으로 비파나무 졸음이 우거진다
오후의 빗방울은 꽃을 조문하듯 입술에 닿고
먼저 당도한 새들 묻지도 않은 길을 낸다
사랑하는 마음조차
혁명이라고 여기는 늦은 계절
저항을 저버린 이팝나무 꽃잎들이 바닥으로 투신한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시인의 얼굴에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우산은 넓은 세상 속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
뚜벅뚜벅 물을 건너뛰고
사사로운 욕망들을 반복해서 흘려보낸다

돌아와 앉으면 비에 젖은 두 눈이
고스란히 어두운 방을 덮고 있다

당신을 사랑해서 슬프지만
고맙다고 안녕을 전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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