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처에 바르는 연고 - 김옥종

마루안 2020. 12. 31. 19:56

 

 

상처에 바르는 연고 - 김옥종


눈보라가 울음을 크게 울던 날에도
상처 난 갈대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바람이 들고나는 통로에서 누군가의 갈대는
시린 등을 내주어 부벼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외로움을 방치하지 말 일이다
더는 그 쓸쓸함을 묵혀 두지 말 일이다
네가 가장 나를 외롭게 한 이였으니
살면서 다 갚아줄 일이다

생채기는 안으로 내야 더 깊어지는 것을

소리 내어 울지 말 일이다
뒤돌아봐야 하는 것들에게는
아쉬운 세월의 발자국들을
그저 덮어버릴 만큼만 눈꽃이 쌓여
가슴을 헤집고 걸었던 그 길 위에서도
상처 난 갈대가 부러지지 않는 것은

사람이 들고나는 길목에서
누군가의 갈대가 속대를 비워
네 살을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해넘이 - 김옥종


잎새 하나 달지 못한 겨울나무에도
눈꽃은 피고
봄을 품어야 겨울은 깊어진다
아랫목이 따뜻한들 네 살갗만 하겠는가?
나무껍질 안으로 느껴지는 온기가 헐거운 몸으로 덥히고 있으니 기다릴밖에
더 야윈들 눈이 얹혀 쉬었다 갈 자리마저 없겠는가?
한나절 쪽빛으로는 어림도 없을게다
초점 없는 네 돋보기로는 햇살 한줌 건져내는 것도 수월치 않을게다
온기를 져버린 것이 어디 겨울뿐이겠는가
사는 것이 의리이어야만 한다면 기꺼이 견디어보마 하지만
네 가려운 것도 긁어줄 수 없다면 태워버리는 것이 더 위안이었음을
내가 그토록 건져 올리고 싶은 바다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조경지대 포말 속에서 은신하고 있던
네 생활을 가까스로 낚아 올려놓으면
은빛 생채기에서 흘러내려 번지는 노을이 뜨겁다



 

# 김옥종 시인은 1969년 전남 신안의 섬 지도에서 출생했다. 2015년 <시와경계>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민어의 노래>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야(除夜) - 전영관  (0) 2020.12.31
생은 가엾다 - 허연  (0) 2020.12.31
꽃아, 가자 - 김점용  (0) 2020.12.30
우주의 행복을 누린다는 건 - 권지영  (0) 2020.12.30
허세나 부리며 - 서상만  (0) 2020.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