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아, 가자 - 김점용

마루안 2020. 12. 30. 22:03

 

 

꽃아, 가자 - 김점용


꽃아, 가자
네 온 곳으로
검은 부르카를 쓰고
아무도 몰래 왔듯
그렇게 가자

검은 우물 속이었을까
밤새 울던 풍경
먼 종소리 그 아래였나
푸른 별을 타고
색 묻지 않은 별빛을 타고 돌면서
삼천대계를 돌면서

꽃아, 가자
혼자 싸우듯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아무도 몰래
네 온 자리
색 입지 않은 곳
별 뜨지 않은 곳
가자, 꽃아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스위스행 비행기 - 김점용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여보, 잘 들어. 악성이고... 말기래. 아스트로싸이토마(astrocytoma)* 머릿속에 퍼진 것도 2기쯤 된대. 김 교수 말로는 생존율 중앙치가 13,4개월인데 표준을 벗어나는 케이스도 많대. 수술하자. 안 하면 6개월... 실은 그것도 힘들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제발 수술하자 응? 내가 살릴게 꼭 살릴 거야.

미안해. 안 할 거야. 약속 지켜.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 끊어줘. 내 통장에 돈 있어. 스위스 가고 싶어.

나는 지금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다
안전벨트도 없고 기내식도 없고 스튜어디스도 없지만
존엄사가 인정되는 삶과 죽음의 중립국
스위스행 비행기 안에 있다
높고 아득한 공중을 날고 있다

아스트로싸이토마?
내 머릿속에 박힌 무수한 죽음의 별들이
날아가는 내 몸의 균형을 잡아 준다
그래, 지금까지 너무 한쪽으로만
비대칭으로 살기만 한 거야 영원히 살 것처럼
익룡의 깃털이 비대칭이어서 하늘을 날 수 있었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날지는 않았겠지
가끔은 적에게 쫓겨 죽은 척도 하고
잠시 잠깐 죽는 연습도 하며
이 무거운 별에서 이륙하기 위해 죽어라 달리다가
덜커덕 죽기도 했겠지
한 마리의 익룡이 하늘을 날기까지 겪었던 무수한 실패와
단 한 번의 성공을
나는 지금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 보고 있는데
모든 별들이 살아 있는 죽음을 나르는 칠성판
영원히 사는 인생이 어딨어
내 머릿속의 별들도 조용히 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혼자서 스스로의 장례를 치르며 두 팔을 활짝 벌리네


*별무리 모양의 성상 세포종

 

 

 

# 김점용 시인은 2017년 오른쪽 뇌 악성 암 수술을 받았다. 호전이 되던 암이 재발해 작년과 올해 재수술을 한 후 현재 항암치료 중이다.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는 10년 만에 나온 세 번째 시집이다. 병마를 이겨낸 시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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