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중하순 무렵 - 정충화

마루안 2020. 12. 28. 21:30

 

 

중하순 무렵 - 정충화

 

 

언제부턴가

만취한 뒷날엔

변기 속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 날 내가 낳은 배설물들은

탁도를 높인 채 바닥에 검게 웅크리고 있다

내 몸에 가득 찼던 달은

눈에 띄게 면적이 졸아들었다

 

간간이 또래의 사람들이

꺾이는 것을 본다

그들 삶이 종영되는 것을 보면서

내 것의 상영 시간은 얼마나 남았나

부질없는 셈으로 걱정을 쌓기도 한다

 

술을 마실 때마다

몸 안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게 보인다

나의 수계는 천천히 낮아지고 있다

하부 깊은 곳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침식들

 

나는 어릴 적 지나쳤던 홍역을

이제야 치르고 있나보다

 

 

*시집/ 봄 봐라, 봄/ 달아실

 

 

 

 

 

 

눈꽃 - 정충화

 

 

몸을 씻다가

밋밋한 가슴팍과 치모 사이에서

흰 터럭 몇 오라기를 보았다

나 모르는 사이

몸 구석구석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러 해 전부터

머리에만 조금씩 내리던 눈은

이제 턱의 절반을 덮고서

가을걷이 뒤 빈 들 같은 가슴과

외진 포구처럼 움츠린 샅에까지

쌓이고 있었다

 

늙어간다는 것은 이렇게

몸 위에

눈꽃이 번져가는 것이었구나

 

 

 

 

# 정충화 시인은 1959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2008년 계간 <작가들>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누군가의 배후>, <봄 봐라, 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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