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건너가다 - 박병란

건너가다 - 박병란 이른 새벽 부음이었다 목이 말라 부엌 전구를 켠다 거실로 포개지는 표정 없는 빛과 건너편 집에서 새어나오는 말 없는 불빛 제사상에 오르는 식은 산적처럼 핏기가 없다 가기 할 뿐 오지 않는 언덕이 가깝다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은 이제 귀퉁이가 맞게 잘 접어 뒤축 자른 짚신 사이에 끼워둔다 생은 이쪽과 저쪽에 놓인 숟가락처럼 엎어놓고 보면 한순간 무덤이 되어버리는 일 젓가락 한 벌처럼 다정한 오누이를 자처하며 넙죽넙죽 술을 건네는 일 비단 물 한 모금 마시는 것과 물 한 사발 떠놓는 일이 영영 못 보는 일이어서 밖에는 얼음이 얼고 우엉 달인 물 유독 달게 느껴지던 밤 언제 한번 다녀가라던 말은 달이 뜬 쪽으로 고개가 꺾인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치우치지 않는..

한줄 詩 2021.01.21

가을의 문턱 - 김영희

가을의 문턱 - 김영희 절기는 더위를 땅 밑으로 끌어내렸다 중력의 자장 속으로 들어가는 치솟았던 감정들과 어느덧 지쳐버린 유한한 모양의 요소들 한때는 무한함을 믿기도 했었던 가령, 사랑이나 희망 따위 여름을 벗어놓은 시간은 고적한 것들을 가을의 문턱으로 부른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쓸쓸해지는 처서를 건너는 저녁 변신과 함께 사라져갈 풍경과, 낯선 노래를 주머니 속에 구겨 넣으며 미리 와 있었던 추억처럼 나는 나를 기다린다 *시집/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달아실 뒤란 - 김영희 그해 엄마를 태운 꽃가마가 마지막으로 뒤란을 한 바퀴 돌 때 얼굴들은 젖은 뒤축 한 구석을 수런수런 말리고 있었는데, 뇌수를 말리는 맨드라미는 꽃상여에서 떨어진 한 방울 울음이어서 색이 진했다 단 한 번도 드..

한줄 詩 2021.01.21

낡은 신발이 남긴 긴 발자국 - 김태완

낡은 신발이 남긴 긴 발자국 - 김태완 가슴 한편 아물지 않는 멍울 같은 것 헛주먹으로 무딘 가슴을 친다고 묵직한 멍울이 떨어지기야 하겠는가 오랫동안 한참을 바라보았지 치열하고 무거운 걸음을 내려놓은 성자의 침묵 고요함이 주는 느린 상처 이제 한 걸음 더 숙연한 길을 향하여 너에게 간다. 낡았다는 것은 너의 소리를 기억한다는 것이지 깊게 더 깊게 너의 안쪽을 향하여 내 슬픔을 욱여넣고 세상의 수많은 질문을 지나왔다는 것이지 지친 걸음을 붙잡고 질긴 집착은 길어지네 가슴 한편 매달려 있던 멍울 한 켤레.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짝짝이면 어때 - 김태완 짝, 이라는 말은 둘이라는 것 짝짝, 이라고 붙이면 다르다는 것 자세히 보니 내 눈이 짝짝이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다 그런데 꼭 짝, 같다 몸..

한줄 詩 2021.01.20

옛집 - 조성순

옛집 - 조성순 살던 집에 가봤네. 사랑은 퇴락하여 반쯤 무너지고 댓돌엔 인적 그쳐 이끼 거뭇하네. 마루 밑엔 녹슨 낫과 호미, 흙이 되어가고 밟으면 우렁차게 소리치며 돌던 네 기상은 어디로 갔나? 허물어진 헛간에 탈곡기 무심히 놓여 있네. 부엌에선 어머니와 아주머니들 고소한 냄새 가득한 음식 장만으로 부산하고 바심하는 마당엔 할아버지 숙부님들 듣기 좋은 웃음꽃 피우고 누이들과 나는 장난질하며 볏단 날랐지. 장대비 오는 여름날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꾸리가 신기했지. 개구리들이 둥둥 배를 두드리며 마당을 가로지르고 습기 찬 도랑에선 가끔 두꺼비가 나들이 나왔지. 그리운 것들은 다 가시고 들에 있던 개망초, 옆으로 기어가는 바랭이풀 마당을 덮었구나. 눈시울 뜨거워져 발길을 돌리는데 -아들아, 아들아, 돌아오..

한줄 詩 2021.01.20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 인연이 느슨해져서 꽉 물고 안 놓을 것만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밤길을 걷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다 돌고 돌아서도 걷다가 머리를 밀어볼까도 생각하였다 우리는 단추 같은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어서 같은 단추들과 나란히 배열을 이루다가도 떨어져 온데간데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단추 같기도 할 것이어서 도무지 헐렁해져서 어느 날 다시 입을 수 없는 벗어놓은 바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어떤 일 같은 것들은 단추가 되어 매달리기도 하고 우리의 아무 일 같은 것이 단추가 되어 느슨히 떨어지기도 하는 그 극명한 절정의 전과 후가 만들어낸 길을 걷다가 그만 실을 밟고 실에 감겨 넘어지면서 밤길을 걸었다 ..

한줄 詩 2021.01.17

하루 - 함명춘

하루 - 함명춘 몸져누운 미래는 여전히 차도가 없고 주식은 깡통이 되고 또 내지 못한 사직서를 가슴에 묻고 돌아오는 길 기분은 착찹해지다가 낙엽처럼 차도 밑으로 한 번 더 떨어지고 납덩어릴 메단 듯 발걸음은 무겁지만 걸을수록 조금씩 내 편에 서서 바람은 불고 풀이 죽은 내 어깨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견장을 달아주며 저만큼 황혼이 어깨동무를 해줄 듯 서있고 모세의 지팡이처럼 내 발걸음 닿을 때마다 붉은 신호등에서 푸른 신호등으로 홍해같이 횡단보도가 활짝 열리는 길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면 나를 위해 박수를 치듯 비둘기 떼 날아오르는, 그래도 흐린 시간보단 한 주먹 쌀만큼이라도 해가 뜬 시간이 더 많았던 하루 그래, 누군가 어디선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붕..

한줄 詩 2021.01.17

껌 씹는 염소 - 조우연

껌 씹는 염소 - 조우연 껌을 씹다가 뺨을 맞아본 사람은 안다 번쩍, 섬광으로 빛나는 외로움의 발화점을 사각의 하악 구조를 한 사람들의 밑바닥에는 쓸쓸이라는 씹던 껌이 쩌억, 눌러붙어 있음도 안다 풀밭의 검은 염소가 몇 시간째 껌을 씹고 있다 반추동물처럼 고독의 고삐에 묶여서 너 역시 몇 시간째 땡볕 아래서 우울거리고 있지 사는 게 이렇게 질기다네, 질겅 슬퍼서 건방져진 표정을 후려 맞아도 멈추지 말아요, 질겅 염소가 입을 오므려 풍선을 분다 팽팽히 긴장한 풍선이 퍽 하고 터졌을 때 너는 그만 어두운 표정을 들키고 만다 들켜버린 표정은 함부로 뱉어선 안 되지 상처는 오래 씹어서는 안 되고 잘 싸서 버릴 것 질겅!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약국(藥國) - 조우연 아픈 자가 이 나라의 일개 서민들이다...

한줄 詩 2021.01.17

동성애자 - 이수익

동성애자 1 - 이수익 침묵은 다디단 액체처럼 내 입안을 적신다 아무런 말도 없이 동성애자끼리의 물리칠 수 없는 결함이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가 흘린 침 사이로 당신이 지나간다 연거푸 내가 지나간다 얼굴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시집/ 조용한 폭발/ 황금알 동성애자 2 - 이수익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현재가 있다 그것은 이미 과거로부터 허락 받은, 미래로 나아가게 될 유산 그리고 업적,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를 존중한다 탐미의 눈길로 조용히 바라다볼 것 크고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듯 욕망을 자제하며 당신을 지킬 것 어떤 외부의 침략에도 견고하게 나의 주장대로 벽을 세울 것 우리 둘만의 고통과 기쁨이 넘쳐 올라 외부를 지배해 나갈 것..

한줄 詩 2021.01.16

눈보라 - 박윤우

눈보라 - 박윤우 블리자드, 물 건너온 말씀이다 자음동화가 없이도 보드랍다 바람찬 흥남부두에 흰색 한 소절 섞으면 동쪽이든 남쪽이든 눈보라 친다 제 무게만큼 고요하고 제 너울만큼 바람이 깃을 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눈보라였던, 그 말씀 어디에 가파른 풍경이 도사려서 사납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나? 아버지의 술냄새 끝, 누수(漏水) 같은 잠결 속으로 막막한 것들이 막막하게 숨어드는데 지금 창밖에는 기척 없는 소란, 자세히 보면 모두 관절이 없는 것들, 전신이 통점이어서 낱낱이 흰 것들이다 선잠 든 아버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으시나 굳세어라 금순아를 외치시나 숨소리가 내리 엇박자다 전선야곡이 늦은 밤 가요무대를 적신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괄호 - 박윤우 엄마 발톱을 깎..

한줄 詩 2021.01.16

파킨슨 씨를 만난 날 - 허림

파킨슨 씨를 만난 날 - 허림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걸려요 길지도 않은 말 잘 할게요 하느라고 한 세월 주름 늘어진 얼굴 낡고 어눌한 모음으로 남은 당신 말뿐일 말 잘 하지도 못한 처음의 말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견뎌냈을까 나는 지금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허울뿐인 사람 자꾸 처음을 기억하며 한 말 또 하고 또 처음을 잊어버리는 신음의 끝은 어디인가 당신의 처음에도 신음이 있었는지요 처음을 자주 기억하던 날도 처음을 자꾸 잊어버리는 날도 당신한테 잘 할게요 그냥 열심히 해볼게요 살 때까지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 장설(壯雪) - 허림 막차도 못 타고 터미널 근처 여인숙에 들어 자리 편다 이러저리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뒤척이다가 카톡으로 와 있는 모바일 ..

한줄 詩 202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