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붉은 계양대에 따개비 같은 바람이 잔뜩 붙어 있다 아무리 떼어내도 달라붙는 난폭한 바람 물밑을 알리는 부표 몇 시간을 달려온 어선들의 종착점, 어떤 파도도 물기둥에 떠 있는 아버지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중력을 만나야 무게가 생긴다는데 천적 바람과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여도 침몰하지 않는다 수평선에 더듬이를 세우고 마치 외계 같은 밀봉 속 그는 고요하다 몇 번 크게 들이마신 결심인 듯 단숨에 들이킨 심호흡같이 새어 나간 적 없는 공기가 깊고 깊은 물속을 수면 위에 올려놓고 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결심을 쉽게 풀지 않는 부표는 섬광 반짝이는 칠흑의 바다를 돌본다 물때만 끌어안는 굳건한 약속 어떤 폭풍에도 물밑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짭조름한 양수에 등을 대고 바다 안쪽의 ..

한줄 詩 2021.12.28

그 나무는 이미 - 박인식

그 나무는 이미 - 박인식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죽어 지냈기에 숨죽여 나를 죽여왔으면 보다 못해 그 나무가 먼저 죽었을까 탁- 찰나의 삶을 죽음의 영원으로 꺾어 자신의 죽음 앞에 이미 와 있었던 내 죽음으로 데려가 지옥에서 보낸 랭보의 한 철보다 어느 날 산에서 영원으로 꺾어진 내 첫사랑의 스물두 살보다 죽음에서 보낸 내 여름 한 철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즐거운 오타 - 박인식 방랑보다 황당한 인생은 없다던 내 방랑인생의 황당을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는 황홀로 바꿔놓고 운전면허도 차도 없이 음주운전하는 음주시인을 음유운전하는 음유시인으로 가꿔놓고 산을 첫사랑한 산벗이 산벚꽃으로 진 슬픔을 산벚꽃 산에서 지다, 로 은유하더니 이라는 이번 시집의 원제도 로 고쳐 죽음까지 살아서 즐기..

한줄 詩 2021.12.28

대광여인숙 - 석정미

대광여인숙 - 석정미 -꼽추 아저씨 유난히 지렁이가 많던 골목 햇볕은 따갑고 얇은 살 속으로 모래가 박혔다 꼽추에 난쟁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손수레, 좀약, 까만 고무줄 실은 세상에 필요한 슬픈 것들 사람들은 슬픔인 줄 알면서 골라 갔다 바닥을 끄는 지렁이 길 침을 뱉고 지나갔고 땡볕에 붉어지는 등 밟혀도 낮은 길뿐 저녁이면 대광여인숙 낡은 지붕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에 파란 소주병이 기울고 꿈길처럼 밀려오는 모서리 저녁노을 꼽추 아저씨도 세상의 지렁이도 날개가 없어 슬펐던 날들 밤이 오면 대광여인숙 간판에 백열등이 켜진다. *시집/ 대광여인숙/ 어린왕자 대광여인숙 - 석정미 -앉은뱅이책상 작은 도랑을 하나 끼고 검은 통로 어둡고 긴 자취방 키만큼의 공간만 허락해 연탄불로 온기 나누던 방죽처럼 길쭉한 직..

한줄 詩 2021.12.27

택배 - 최규환

택배 - 최규환 파업이 끝났고 눈을 밝게 비춰줄 스탠드가 도착했다 삶에 대한 밝은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데 상자를 놓고 간 그에 대한 이해는 파업이 끝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기슭에서 보내온 늙은 어미의 편지 혹은 잠든 아이를 뉘이며 막차가 끊어지기 전 돌아오겠다던 마음이 혹은 깡마른 놈과 눈이 맞아 짐을 싼 아내를 포기해버린 또는 고독사를 준비하며 남은 며칠을 더 살고 있을 아니면 치솟는 집값에 사랑을 포기한 청춘이었을 그런 택배 절체절명의 속속들을 문 앞에 두고 간 통로엔 바람이 서성거렸고 파업은 끝났으나 기한 없는 삶으로 인해 빈 상자의 여운과 마주하는 기막힌 이 시대의 허기 나는 조금 더 두툼하게 스탠드 밝기를 조절한 후 별수 없이 간격 사이에 허망한 그림자를 앉혔다 *시집/ 설명할 수 ..

한줄 詩 2021.12.26

고마운 일 - 김주태

고마운 일 - 김주태 아이들이 어릴 때 이 동네로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 이름 없는 잠바를 입고 이이들은 즐겁게 힙합을 따라 했고 가끔 먼 곳으로 떠날 꿈을 꾸다 돌아오는 날이면 집을 잃은 큰 개가 현관에 버티다 끌려갔다 또래들은 하나둘 골프장으로 가고 땅을 보러 다니고 동네 사람 반이 신축 아파트로 옮겨 갔지만 우리에겐 늘 넉넉한 저녁이 있었다 코코넛을 씹으며 딸은 누구나 가는 대학을 고르는 중이고 점심 먹고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다 아내와 나는 낡아가는 외벽처럼 아무리 닦아도 빛나지 않은 돌처럼 굳어간다 이런 것이 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아버지 - 김주태 남의 사과밭에 들어가 익지도 않은 풋사과를 작대기로 내리치다 주인한테 들켜 개처럼 맞고 집에 오자 ..

한줄 詩 2021.12.26

어느 별의 편지 - 이윤설

어느 별의 편지 - 이윤설 우리는 사막의 절반을 지나왔으니 이 기후가 바뀌어도 이젠 좋겠다 우주는 먼 시간을 돌아 순환한다는데 화석이 부서져내리며 이제는 내 차례가 되어도 좋겠다 하늘이 준 눈물과 마른 땅이 고요히 입맞춤하는 계절이 나의 별에 시작되어도 좋겠다 그 사막의 폭풍이 지나가는 길에 나는 죽은 나뭇가지로 모래에 귀를 대고 누워 있었으나 누운 채로 오래도록 뜨거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최초의 나무가 시작되는 것을 당신이 숲이 되어 치마를 끌고 나와 그 치마폭에 나를 주워가줄 것을 알고 내 가지는 내 뿌리가 될 것을 알고 떠났던 잎들과 비와 향기로운 바람과 함께 당신이 오기 쉽도록 모닥불을 피우고 별은 양치기를 찾아 줄지어 떠나가는 하늘 아래 이 사막은 모래를 모두 쏟아버리고 맑은 유리잔 같은 ..

한줄 詩 2021.12.26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김선우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김선우 -구름에게 배운 것 ​ 구름이면서 구름들이지 지금의 몸을 고집하지 않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지 ​ 두려움 없이 흩어지며 무너지고 사라지는 게 즐거운 놀이라는 듯 다시 나타날 땐 갓 태어난 듯 기뻐하지 그게 다지 곧 변할 테니까 ​ 편히 잠들기 위해 몸을 이동시키는 법을 나는 구름에게서 배웠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도 ​ 그러니 즐거이 변해가는 것 내가 가진 의지는 그게 다지 ​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 3 - 김선우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한줄 詩 2021.12.23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 박주하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 박주하 오래전 지하철 순환선에서 칼갈이를 팔던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뒤집개를 들고 서서 바이올린을 켜듯 칼 가는 시늉을 하던 칼을 들고 다니면 안 되니까 칼갈이의 성능을 보여 줄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그곳에서 귀보다 먼저 가슴에 꽂힌 목소리를 한 번도 잊고 두 번도 잊었는데 칼을 쥘 적마다 떠오른다 홀로 답이 되는 날이면 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칼갈이를 찾는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멀리서 오는 生 - 박주하 사무치게 걸었다 파묻히지 않으려고 길들은 여전히 정처 없고 미련은 악착같이 밤을 쌓아 놓았다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 모두 나의 것이라니 생이 점점 무거워진다 봄바람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아주 작은 풀꽃으로..

한줄 詩 2021.12.23

맹그로브 나무 - 정세훈

맹그로브 나무 - 정세훈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흙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 진흙 위에 뿌리를 내린다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제 뿌리로 제 한 몸 겨우 지탱하지만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 서로의 뿌리로 서로의 몸을 지탱해준다 자리를 잡은 곳이 온통 진흙투성이여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맹그로브 나무들 제각각 흩어져 뿌리를 내리면 이내 모두 쓰러져 죽어버릴 맹그로브 나무들 모두 모여 함께 뿌리를 내려 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엮어간다 한 그루 두 그루 열 그루 백 그루 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심어간다 세세연년 맹그로브 숲을 우거지게 한다 *시집/ 동면/ 도서출판 b 동면 - 정세훈 전철역엔 함박눈 대신 스산한 겨울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출근길을 적시었던 때아닌 겨울비가 깊..

한줄 詩 2021.12.22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 홍성식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 홍성식 부를 이름이 줄어든다는 건 사라질 준비다 형도, 남서부 도시의 밤을 장악한 열아홉 어린 깡패 상대 조직의 칼에 찔려 스물이 되지 못했다 문석, 졸업식도 빼먹은 채 상경한 사법고시 준비생 여덟 번의 쓴잔 마시고 느티나무에 목을 맸다 영철, 여자 넷 사이를 오가면서도 들키지 않았던 카사노바 두 살 아기가 죽자 아내는 감잣국에 청산가리를 탔다 명호, 끝끝내 시인이고자 했던 해사한 문학소년 자본가 장부 정리하며 살더니 편지 한 통 없이 실종 1989년 낄낄대며 철없이 웃던 흑백사진 속 아이들 호명에도 대답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스위치를 올려줘 - 홍성식 견디는 생이 지겹다 턴 오프 한 소식 들은 승려의 돈오돈수처럼 나도 뉘도 모르는 사이 심장을 데우던 ..

한줄 詩 202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