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훌륭한 불행 - 박지웅

훌륭한 불행 - 박지웅 ​ 당신이 보내준 절벽 잘 받았어요 어떤 편지는 아찔하거든요 특히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좋았어요 그 끝에 부들거리며 서 있다 밑으로 고꾸라지는 꿈을 꾸게 되었거든요 그곳에서 누군가 바위로 눌러놓은 봄을 보았어요 동고비 한 마리 깃 비비고 간 그늘에서 천둥소리가 태어나고 그 찢어진 틈으로 빗줄기들을 수레에 싣고 서쪽으로 다 옮기면 장마가 끝나겠지요 청춘은 성냥개비 같은 어깨를 가졌지요 스치는 대로 불이 붙는 곳이었지요 손짓 한번 조심스럽던 날들 이토록 감싸는 건 내게 당신이라는 훌륭한 불행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서쪽을 다 지나온 절벽들이 멈추어 선 곳 찢어 날린 편지가 저녁이 되건 눈보라가 되건 나는 몰라요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가끔 타지 않은 편지가 - 박지웅 산 자들이 쓰다..

한줄 詩 2022.01.12

자술서, 허리춤에서 꺼낸 한끗의 무게 - 송병호

자술서, 허리춤에서 꺼낸 한끗의 무게 - 송병호 목양실, 에어컨 실외기 커버 씌우다 얼핏 눈이 와도 올지 않을 빈집을 본다 성명 위 낙관처럼 각인된 故 질식사 사망 시간을 알 수 없는 끝내 깨지 못해 화석이 된 사란(死卵) 꼬리 긴 둥지 밟힐까 울음도 울 수 없었을 불법 입주 언제 비웠는지, 고요만 슳다 한 해 농사 놓친 힘듬이 느껴오는, 가까워서 너무 먼 빛과 어둠 사이 열대야 불면은 발등만 훑고 갔을 것이다 먹이사슬 윗선 고등의 무례, 피차 生의 平 같은데 여린 빗물로는 씻기지 않을 시월의 바람은 삭연하다 그때 나는 어디서 무엇으로 절반만 사랑하다가 꼭 마지막에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침묵에 드는지 언젠가 헤쳐 갈 무풍의 돛이면 좋겠다 명년, 흙이 새살 돋는 잔설 몽진 다 털어내고 봄꽃 필 무렵 ..

한줄 詩 2022.01.12

비보호좌회전 - 복효근

비보호좌회전 - 복효근 알아서 가라는 뜻일 게다 보호해주지 않을 테니 책임지지 않을 테니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라는 뜻 겁박이거나 책임회피거나 시험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땅에서 왼쪽은 언제나 위험한 곳 숟가락을 왼손으로 잡아들면 대가리부터 쥐어박혔다 반대차선에서 멀리 한 대 다가오는데 망설이자니 뒤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이건 자율의 뜻이라고 직진신호에도 좌회전할 수 있으니 허용의 뜻이라고 왜 매사 못 믿고 주저하느냐 한말씀하시는 것 같다 자율과 허용이 갖고 있는 몇 개의 함정을 나는 안다 직진신호에서 좌회전하다가 골로 간 사람 더러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가 나는 좌빨 소리도 들었고 짤릴 뻔도 하였으니 외야의 좌익수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어쩌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뒤로 저 애매한 시그널 앞에서 겁 많은 이 ..

한줄 詩 2022.01.11

대화 - 김진규

대화 -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 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

한줄 詩 2022.01.11

사람의 일이란 - 안태현

사람의 일이란 - 안태현 영덕에서 일출을 보고 오는 길에 삼중 추돌 사고를 당했다 당신은 새해 액땜한 셈 치자고 말했으나 나는 이 좋은 세상에서 때마침 오가는 일을 생각했다 먼 산에 흩날리는 눈보라 엉겁결에 얻어 입은 죽은 사람의 옷 한 벌 알몸에 걸치고 있었다 떠나본 일이 없는데 나를 여기에 둔 채 저곳으로 빠져나가 이마트 정육점에서 저녁에 먹을 고기를 고르고 겨울딸기를 먹으며 티브이 뉴스 속의 나를 구경한다면 밤의 심심함으로부터 후생이 시작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낭자한 피 한 방울 없는데 타이어들이 슬금슬금 비켜 간다 나는 이미 피비린내다 나는 이미 끊어진 운명선을 쥐고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서 다정다감한 가장의 위엄을 잃었다 우리가 만난 건 몇십 년 헤어지는 건 찰나 나는 알 수 없는 냉정함 속으로 ..

한줄 詩 2022.01.09

함몰 - 윤의섭

함몰 - 윤의섭 달력에 쓰인 일정대로라면 여행을 다녀왔어야 하는데 나는 떠나본 적 없다 다녀왔어도 잊어버린 것인지 눈에 찍힌 발자국이 다시 눈에 쌓여 지워지고 꽃잎 떨궈낸 자리에 새로 꽃잎이 피어나고 봉분 갓 올린 무덤을 풀잎이 뒤덮고 퇴적의 역사는 쉽게 발굴되지 않는다 옷을 껴입지 그래요 추운데 정말 거기 갔을지도 몰라요 모자를 쓰든지 우산을 써 봐요 이런 날 외출하는데 그럼 나는 얼마나 오래 삭제되어 있었던 건가요 사람들이 여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장례라고 말한다 대기권에선 늘 풍장 중인 달력에는 동그라미 표시한 날짜가 있다 여행이 끝나는 날이거나 떠날 날이거나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절리 - 윤의섭 이 상태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내리는 눈과 눈 사이와 수직의 나무..

한줄 詩 2022.01.08

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네 살을 기억한다면 아흔네 살을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첫사랑이 아프다면 마지막 사랑이 안 아플 리 없다 언덕에는 바람집이 있고 집주인인 바람의 발가락을 주무르는 하녀 안마사 나무가 있고 바람과 나무 사이를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 발 시림과 치 떨림 그것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네 살의 바람과 아흔네 살의 나무가 왜 함께 첫사랑을 아파하는지 마지막 사랑을 끝내 기다리는지 바람은 치를 떨고 나무는 발이 시리고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슬로비디오 - 최준 겨울 강가를 걷다가 보았다 머리 위 버드나무에서 날개 퍼덕이는 새 한 마리 앙상한 나뭇가지가 된 발목이 묶여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검은 비닐봉지 아, 알겠다 지난여름 한 때 강물이 그 높이로 흘러갔던 것 상류 어디..

한줄 詩 2022.01.07

가짜도 모르는 가짜뉴스 - 정덕재

가짜도 모르는 가짜뉴스 - 정덕재 -가짜뉴스박멸법 제정 밤이 아니라 낮이에요 가로등 불빛이 환한데 밤이라고요 누가 봐도 낮이죠 가로등이 졸고 있다고요 그건 김수희 노래에나 나오는 말이죠 가로등 아래에서 사람이 졸고 있다는 말이군요 2021년 6월 21일 저녁 10시 30분 대전시 오류동 우체국 앞에 있는 술집에서 취객이 가로등도 졸고 있다는 가수 김수희의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가로등이 깜박깜박 졸았다 '가로등을 졸게 만든 취객 알고 보니 김수희 팬' '가로등을 졸게 만든 한국전력 관계자 당직 중에 깜박 졸아' '가로등 아래 노상방뇨하던 시인 감전으로 졸도할 뻔' 가로등 아래에서 졸았을 뿐인데 가로등이 졸았을 뿐인데 가짜뉴스는 문맥이 끊긴 말줄임표 같은 점멸신호를 보내며 순간순간 거짓 구호를 만든다 가로등..

한줄 詩 2022.01.07

배심원 - 안은숙

배심원 - 안은숙 나는 마흔에 기소되었다. 배심원들은 내 마흔에 대한 죄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흔은 죄지은 나이 투덜거림으로 식탁을 차려야 하는 지독한 권태, 그래서 난 낯선 밤을 사랑하기로 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켜고 외출에 몇백 명의 애인을 숨겨두고 싶었던 나의 마흔은 낯익은 사람들이 싫어지는 나이, 판결을 운운하던 날 보라색 속옷을 사들였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마흔 개의 꼬리를 단 나는 꼬리가 길어지는 이유를 자꾸 병원에 물었다 온갖 연령대들로 구성되어 있는 배심원들 그들은 내가 지나쳐 온 연령이거나 지나친 연령, 사소한 너는 그때 치마를 입지 말았어야 했어 줄 나간 스타킹을 돌돌 말지 않았어야 했어 종교에 귀의할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의견은 달랐다 나는 ..

한줄 詩 2022.01.06

눈오는 들판에서 - 박남원

눈오는 들판에서 - 박남원 이승에서 살다 살다 해탈까진 못하더라도 먼지 때 묻은 마음밭 열심히 쟁기질하여 갈고 닦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눈 내려 수심 깊은 들길 한줄기. 우물물 길어 올리듯 세상 하나 길어 올리며 결국,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에게 가는 길. 가도 가도 길 아닌 길 위에서 길조차 눈이 되어 흩날리는데, 그대는 어느 심연의 바닷가에서 눈 내리듯 어디쯤 오고 있는가.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소한 추위 - 박남원 소한 추위에도 인부들은 인력사무실 기름 난롯가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피곤함과 초조함이 날실처럼 교차하는 이른 새벽. 얼룩진 페인트 벽 위로 흐릿한 형광 불빛은 밤 거미처럼 기어 다니고 연장 가방에 담긴 하루치의 연명은 한겨울 날파리처럼 가볍다. 기..

한줄 詩 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