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마침내 - 천양희

마침내 - 천양희 아침 바람은 가로등에 스치고 눈 내리는 날엔 풍경이 풍경을 본뜨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고 매일 실패하며 살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젊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조금씩 물러나고 우리의 찬란이 세상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마음에도 벽이 있고 생각에도 동굴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닫고 살기보다 열어놓고 살기란 더 강력한 삶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묻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때 마음에도 야생지대가 있군, 중얼거리며 내가 마침내 할 일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보는 것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사소한 한마디 - 천양희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잭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

한줄 詩 2022.01.03

음식에 대한 예의 - 김승강

음식에 대한 예의 - 김승강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좀스럽다 하겠지요 바닥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는 개미도 먹고 진드기도 먹는다고 하셨죠 잔반은 개도 먹고 돼지도 먹는다고도 하셨지요 저는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버려지는 음식이 아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버려지는 음식이 안타까워요 버림받는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죠 내가 거두고 싶어요 고아를 입양하듯이 버리려면 나에게 버려주세요 내 위가 음식물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내 몸이 음식의 고아원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상한 음식이 아니라면 저를 주세요 음식은 음식으로서 역할을 다할 때 음식인 거겠죠 그들의 역할이 다하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그게 나를 살게 하고 우리를 식구이게 한다고 봅니다 *시집/ 회를 먹던 가족..

한줄 詩 2022.01.03

꽃별 지다 - 김남권

꽃별 지다 - 김남권 한 사내가 죽었다 종각역 4번 출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보신각 뒷골목에서 가로 육십 센티 세로 백육십 센티 빈 박스 속에서 마른 새우처럼, 최초로 엄마의 바다를 헤엄칠 때처럼,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또 다른 노숙자가 다가와 그의 안부를 물었고 곧이어 구급차가 나타나 그를 싣고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삼십 년 전 종묘광장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하고 서울역과 청계천 빌딩 숲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순간에도, 달방호의 차가운 물길 속을 걸어 들어가던 순간에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조문도 없는 길 위에서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고 다시 새..

한줄 詩 2022.01.03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첫눈이 왔을 뿐인데 쇄출기가 고양이 발걸음처럼 느릿느릿해지고 첫눈이 왔을 뿐인데 갑자기 허기가 져 순댓국에 소주를 시킨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흐린 창밖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오래 서성이고 첫눈이 오자 인쇄골목 사람들은 그동안 망설이던 기차를 타고 고향의 설원을 향해 달리는 꿈을 꾼다 늙은 쇄출기가 밤새 콜록이던 골목골목에 아픈 상처를 더듬듯 눈은 낡은 입간판을 어루만지고 천막 위에 흰 천막을 덮는다 그곳에 맨 처음인 듯 쓰여진 눈의 마지막 문장에다 마침표를 찍으려 들뜬 사람들의 분명한 발자국이 지워지고 다시 찍히고 있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늙은 암고양이 밤새 낡은 쇄출기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좌우 막힘없이 몸놀림 가볍던 지게차는 눈송이 하나에도 무..

한줄 詩 2022.01.02

바닥이라는 말 - 이현승

바닥이라는 말 - 이현승 우리들의 인내심이 끝난 곳. 사는 게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별 볼 일도 없는 삶이라서 별이라도 보는 일이 은전처럼 베풀어지는 거겠지만 사람이란 후회의 편에서 만들어지고 기도의 편에서 완성된다고 할까. 부드럽게 호소해도 악착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많은 간구의 눈빛과 목소리를 신은 어떻게 다 감당하고 있는 걸까. 콩나물처럼 자라 올라오는 기도들 중에서 제 소원은요 다른 사람 소원 다 들어주고 나서 들어주세요. 하는 물러 빠진 소원도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선 곳 그러니까 풍문과 추문을 지나 포기와 기도를 지나 개양귀비 뺨을 어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가까운 진흙탕 위로 내려앉는 것을 본다. 아무리 맑은 우물이라도 바닥사정은 비슷하다. 그러..

한줄 詩 2022.01.02

목구멍 - 우혁

목구멍 - 우혁 세상의 모든 병(甁)에서는 비슷한 맛이 난다 차마 울 수도 없던 묵직한 것이 가래처럼 버티고 있다 그들은 영혼이 목구멍 속에 있다고 믿었다 마음은 목구멍 속에서 기도와 식도를 넘나들고 침을 삼킬 때 울컥하고 밀려오는 건 너의 오래된 슬픔 고삽(固澁)의 모양새대로 넌 울 때조차도 목구멍을 벗어날 수 없어 먼지 맛이 나는 어제 우린 늙는다 허나 줄어들지 않는다 그 반복, 나는 분명 너라고 하나밖에 없는 목구멍으로 발화한다 타들어가는 말은 경계에서만 뜨겁다 나의 존재가 시간과 반비례 관계는 아니란 거 어쩜 우린 지독한 영생을 누릴지도 모른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발바닥 - 우혁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어 꽃은 피고 지고 더 이상 머무르지 마라 길은 나를 알고 있었고 나는 모든 길 ..

한줄 詩 2021.12.31

오고 또 오는 - 이은심

오고 또 오는 - 이은심 우주의 질량은 변함이 없다니 먼지의 총량을 쓰윽 닦아내는 무릎의 수고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울음도 가만 두면 썩을 것인가 번번이 옳은 청소도구와 올바른 물걸레가 첫눈 같은 얼굴로 쓸어내는 오고 또 오는 불화의 장르들 내 지옥도 조금씩 버리면 덜 아팠을지 몰라 수박은 씨를 아무 데나 뱉는다 어디서든 불어닥치는 생이 앞치마를 벗어 터는 곤한 저녁에 안주인이란 식후에 창문을 넓게 열고 새 수건을 갈아주는 사람 물로서 물을 씻어 먹는 결벽증은 밖을 묻히고 오는 강아지를 하얗게 빨아 널 텐데 시계가 시간을 떨어뜨린 곳 싸리꽃 흰 빛 다투던 곳 헛되고 헛되니 나는 발작적인 결백에 전염되었는지도 모르는 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든 훌훌 사라진 다음이란 마음껏 닦아 세운들 꽃바람일 리 ..

한줄 詩 2021.12.30

당부 - 김용태

당부 - 김용태 오래 전 사진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등에 걸린 책보가 위태롭구나 밀린 육성회비를 채근하던 선생님, 궁핍한 생활도 체념하듯 원망 않던 순한 아이야 물려받은 크레용으로 회색 하늘을 그려야 했던, 너는 다행히도 아직은 허리 굽은 부모를 가졌구나 오늘은 고단한 너를 위해 먼 훗날 네 여자를 시켜 변변치 않은 찬이나마 더운 밥을 준비 하마 철없는 새끼들 가꾸며 힘써 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만 겨우 허기 달래 줄 살림으로 저녁상을 마주했구나 그렇게 뒷날 네가 나를 살 때 어려 그렸던 꿈마저 펼쳐 주지 못한 채 이 모습으로 너를 맞게 되었으니 염치없는 일이다만 내민 손을 잡아다오 두려워하지 말고 머뭇거리지도 말며 운명인 양 걸어서 와 다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나이테에 ..

한줄 詩 2021.12.30

13월의 달력 - 임경남

13월의 달력 - 임경남 더는 갈 데가 없는 13월의 달력은 냉골이다 일마저 끊긴 겨울에는 말이 입안으로 말려들어가 목소리까지 증발해버린다 나는 수취인불명 식은 텔레비전은 혼자 놀고 전화기는 손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인기척이 졸아든 집에 행주는 비틀린 채 말라가고 달력의 표정은 똑같다 오래 전에 탕진해버린 젊은 날 파산한 추억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납작하고 흔들리며 가는 독거는 갈아입을 감정이 없다 어떤 부호도 와서 같이 살지 않은 탓이다 누구에게도 번지지 못하고 봉지처럼 캄캄해지느라 희망의 패를 놓친 사적인 백산빌라는 한 켤레의 어둠을 신고 끈질기에 나를 찾아오는 것인데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이명(耳鳴) - 임경남 이명은 빵 속에 빵이 사라진 난처함이다 뿌리는 어디에 걸어두..

한줄 詩 2021.12.29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햇살을 등에 꽂고 낙타가 걷는다 무심히 혀로 콧구멍을 핥는다 나는 편안히 앉아 익숙한 비애를 본다 와이드 화면 속 모래바람은 회오리치고 열 받은 팝콘은 지리멸렬 터진다 낙타는 우스꽝스럽게 울지만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단내가 화면 밖으로 품어 나온다 지긋이 눈뜬 낙타의 검은 망막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뜨거운 혹 만년을 이고 다녀도 긴 눈썹 한번 깜빡이면 화면이 바뀐다 마른 오아시스에는 오늘도 불굴을 되새김질하는 흔한 낙타가 있다 *시집/ 탄수화물적 사랑/ 한국문연 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엄마가 밥 먹으러 간 사이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 죽음은 객사일까 아닐까 '네 엄마 얼른 오라 해라' 전화기 건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삼팔따라지 박..

한줄 詩 2021.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