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눈은 퍼붓고 쌓이고 나는 얼굴을 바꾸지 못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지 오래 베개가 내 얼굴을 반쯤 파묻어버리도록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당신이 내 생각을 하는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은 지 오래 침대는 네 다리로 서 있거나 버티고 있거나 내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오래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의 숫자만큼 눈이 내리고 고드름처럼 얼어붙어가는 나의 침대는 삐걱이고 다시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퍼붓고 아우성치고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당신이 되어왔다는 걸 모르지 않은 지 오래 우리는 한밤중에 깨어나 당황하며 모르는 척 눈을 감은 체 발을 숨기고 속눈썹을 떤다 누가 지금 당신 생각을 하는가 우리는..

한줄 詩 2022.01.20

홀로 하루를 먹는다 - 오광석

홀로 하루를 먹는다 - 오광석 아침에 일어나면 꺼내 먹는 바나나우유맛 밤마다 끓여 먹는 라면맛 홀로 창문에 매달리는 세상과 격리된 수감자 격리를 이겨내는 건 상자 모양 원룸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일 무수한 광고지만 불려 다니는 한산한 당산동 거리 입과 코가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도망친다 바이러스가 엉겨 붙을라 흩어지는 사람들 어제가 복사되어 붙여진 오늘 특별한 것을 찾는데 손님 끊긴 문 앞에 앉은 식당 아저씨 올려다보며 짓는 눈웃음 마스크 속 가려진 속상함이 보인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 하늘에 노란 눈 하나 떠 있다 다크서클처럼 깔린 노을 구름 눈썹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 걷는사람 새들의 출근 - 오광석 이른 새벽 당산역 건널목 부지런히 일터로 향하는 비둘기는 볼록한 ..

한줄 詩 2022.01.20

시(詩) - 우대식

시(詩) - 우대식 음악 아닌 것으로 음악 하기 나인 것을 나 아닌 척하기 가을날 듣는 만가(輓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이런 물음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나그네처럼 우물가에 오래 앉아 있기 아주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하다가 저 푸른 한 점으로 쑥 들어가기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시(..

한줄 詩 2022.01.18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그저 술 좀 과하게 마신 기억밖에는 파도에 휩쓸려 솟구치다 떨어지기를 수차례 목이 타서 깨어보니 웬 낯선 방에 저 여자하고 내가 벗어 놓은 신발짝처럼 나란히 누워있더라고 짚이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꿈속 일 같기도 하고 차려 내온 아침상을 사이에 두고 저나 내나 내세울 것은커녕 그 뿌리조차도 알 수가 없어 감추고 싶은 지난 일들만 들추고 있었는데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이 아주 싫지 않는 눈치더라고 그 날 바로 '해당화' 간판부터 내리게 하고 장화 두 벌 장만하여 물이 들면 바다로 가고 물이 나면 뻘에 나가 사십 년을 버텼지 등기만 내 앞으로 안 해 놨다 뿐이지 그 때는 서해바다 전부가 내 것이었어 사랑? 아무리 근본 없는 갯것들이라고 저리 붉은 시절이 없었으려고 주렁주렁 대..

한줄 詩 2022.01.18

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에서는 가랑잎 소리가 난다. 손으로 꼽아 보면 손끝이 시려 오는 저녁이 있다. 짚가리 냄새가 나고 검불 연기를 좋아하는 나이 서쪽의 나이에는 시린 등이 있다. 돌아앉아 있는 외면하는 방향이 있다. 서쪽의 나이를 서성이다 보면 발등이 시려 오고 환했던 겨울마다 흰 서리가 내린다. 은일자라 불리는 국화가 제철이다. 봄꽃은 놀이를 가야 제 맛이지만 방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국화는 서쪽 나이에 이르러 가꾸기 가장 좋은 꽃 동쪽의 나이들이 찾아들고 북쪽 나이로 두서너 걸음 들어섰음에도 남쪽 나이 이끌고 동쪽이나 서쪽의 나이로 살고 싶은 것이다 고독의 문패를 내다 거는 북쪽 나이 폐일언(蔽一言)하고 동서남북 네 갈래 나이를 한데 버무려 시루에 담아 푹 쪄서 절구통에 부어 놓고 떡메..

한줄 詩 2022.01.17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우는 법을 잘못 배웠구나 바람은 딴 곳에 마음을 두어 근심이고 환절기는 한꺼번에 와서 낯설었다 오후를 지나는 구름이 낡은 꽃등에 앉는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그는 옹색한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다 눈시울 붉히는 꽃은 비극을 좀 아는 눈치다 비통한 주름이 미간에 잡힌다 구름의 걸음을 가늠하는 것만큼 알 수 없는 꽃의 속내 연한 심장을 가진 꽃은 병들기 좋은 체질을 가졌다 그러므로 생의 어느 간절함에서 얼굴 하나 버리면 다음 생에도 붉을 것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계절에는 풍경이 먼저 쏟아졌다 헐거운 얼굴이 간단없이 헐린다 낭만을 허비한 구름은 말귀가 어둡다 색을 다한 그가 급하게 손을 내민다 구름이 무덤으로 눕기 전에 꽃은 더 간절해져야 하므로 울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친절한..

한줄 詩 2022.01.17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자정 넘긴 지하 술집 스물둘 생일을 맞았다는 여급의 조그만 젖꼭지를 만지작거린다 태초의 혼돈이 이처럼 말랑말랑할까 닳은 지문 아래 깨어나는 옛날 검지와 엄지가 우주를 기억해냈다 알려주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죄 젖꼭지 혹은, 우주 앞에 허물어지고 멀리 있는 것들만 취기 없이도 행복하다 말캉거리며 피어나는 꽃들 꽃판에 그려진 적두색 유채화가 해독불가 우주의 비밀스러움과 닮았다 소유할 수 없는 이름 탓에 떠돈 생 기억되는 사건은 왜 남루할 뿐인지 다시 젖꼭지를 비틀며 우주를 만진다 되돌릴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도 없이 오래도록 멀리 떠돌았다 젖꼭지가 흐느낀다 우주가 운다 만질수록 비밀스러워지는 것들이 흐느껴 운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저 좁은 ..

한줄 詩 2022.01.16

엄마의 술집, 그 집의 술국 - 우혁

엄마의 술집, 그 집의 술국 - 우혁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다 밤이 깊고 입김이 거셀수록 겨울은 엄마 집에만 머무는 거 같았다 술 없이 밤을 견딜 수 없는 족속들 오로지 시키는 건 술국뿐 가끔 식은 밥을 말아대며 씩씩대는 김 씨는 국물을 삼킬 때만 사람이 됐다 식은 국물을 몇 번이고 다시 데우고 그때마다 내장이며 순대며 은근슬쩍 더 들어가는 덤덤한 덤은 엄마도 모르고 김 씨도 몰랐다 그러니 나도 모르고 꾸벅 조는 겨울이 더 슴슴한 맛을 내는 거였다 하나 아니면 둘 빨리 비우지도 못하는 잔이 자꾸 밤그림자를 게워내는 것 같았다 어느 유적지에서 오래 유물이 되고 싶었던 입맛이 몇 번 사람이 되곤 하는 밤이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불온한 몸 - 우혁 파도에서 네가 걸어 나왔다 몇 번의 화장(火葬)..

한줄 詩 2022.01.16

달가락지 - 육근상

달가락지 - 육근상 유품 정리하는데 흔한 금붙이 하나 나오지 않는다 자랑이라고는 웃을 때 살짝 보이는 어금니 금이빨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몇 해 전 틀니로 갈아 끼워 오물오물 평박골 만드셨다 팔순에 손녀가 선물한 화장품도 새것으로 보아 바라만 보고 흡족해하셨나 보다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하는 것 좋아하시더니 꽃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귀퉁배기 깨진 밥그릇에 심은 꽃잔디가 마루까지 뻗어 있다 헌 옷가지며 먹다 남은 약봉지 태우다 물끄러미 장꽝 바라보니 남루를 기워 입어 한껏 차오른 달이 가락지인 양 고욤나무 빈 가지에 걸려 빠지지 않는다 무르팍에 얼마나 문질렀는지 반질반질하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여우 - 육근상 ​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

한줄 詩 2022.01.15

미래의 나에게 말 걸기 - 김추인

미래의 나에게 말 걸기 - 김추인 -호모 커넥서스Homo Connexus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2040년쯤 그대는 나인가 나의 유사 종인가 황금비율 아니라도 낡고 삭아가는 대신 바꿔 끼운 관절과 치아 망막과 새 달팽이관으로 씽씽해진 그대를 봐봐 우리는 상상이 가는 대로 구현해 내는 호모 데우스 신의 격노가 도달치 않아 신의 역사를 대리하는 불안의 연대에 미리 끌어다 쓰는 미래도 미래지만 허물고 파고 제동 장치 없이 내달리는 우리의 내일이 겁난단 말이지 봐봐 자연의 불호령이 시작된 게야 벌레도 아닌 균사도 아닌 것이 알은 알인데 쥐뿔도 없는 것이 무수히 뿔난 알이라니 쯧, 놈은 기척도 없이 행성을 꽁꽁 묶는구나 함부로 나대던 나를 너를 격리 시키는구나 유령도시만 같은 텅 빈 거리의 적막 가운데 하늘 맑아지..

한줄 詩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