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마루안 2021. 12. 28. 22:30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붉은 계양대에 따개비 같은 바람이

잔뜩 붙어 있다

아무리 떼어내도 달라붙는 난폭한 바람

물밑을 알리는 부표

몇 시간을 달려온 어선들의

종착점, 어떤 파도도 물기둥에

떠 있는 아버지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중력을 만나야 무게가 생긴다는데

천적 바람과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여도 침몰하지 않는다

수평선에 더듬이를 세우고

마치 외계 같은 밀봉 속 그는 고요하다

몇 번 크게 들이마신 결심인 듯

단숨에 들이킨 심호흡같이

새어 나간 적 없는 공기가

깊고 깊은 물속을 수면 위에 올려놓고

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결심을 쉽게 풀지 않는 부표는

섬광 반짝이는 칠흑의 바다를 돌본다

물때만 끌어안는 굳건한 약속

어떤 폭풍에도 물밑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짭조름한 양수에 등을 대고

바다 안쪽의 검푸른 고집까지

아버지를 지켜내려는 것이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단절의 힘 - 이정희

 

 

꼭 다문 입

단단한 뚜껑은 쉽게

속을 허락하지 않는다

 

뚜껑이 양쪽을 정해놓고

열리고 닫히는 일

자세히 보면 회오리 돌기들이

꽉 맞물려 있다

 

여느냐 닫느냐 필사적이다

탄산가스가 빠지면 이내 밍밍해지는 내용물들

공기로부터 톡 쏘는 맛을 지켜낸다

잠잠한 듯 보여도 틈만 나면

튀어나오려는 폭발

거품은 오래 참았던 곳에서

한 무더기 흰 꽃으로

부글거리며 핀다

 

탄산의 종류는 다혈질

쓴맛을 끝까지 지켜낸 꼭지도

세상 밖의 궁금증을 이길 수 없다

 

마지막까지 몰아붙인

뚜껑의 힘

지상에서 솟아오르는 회오리들이

뚜껑과 병목의 회전에서

픽, 탈 세상이다

 

 

 

 

# 이정희 시인은 경북 고령 출생으로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을 수료했다.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었고 제3회 해동공자 최충문학상 시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꽃의 그다음>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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