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겨울밤 - 육근상

겨울밤 - 육근상 초저녁만 되어도 불 꺼지는 산중마을입니다 산고랑 내려온 바람이 고욤나무 아래 마른 눈 쓸고 가거나 엄니가 켜놓은 얼굴 흔들리거나 처마 끝 매어놓은 빨랫줄 윙윙거리면 도둑괭이 헛간 세워둔 고무래 건드렸나 개들이 컹컹 짖기도 합니다 아버지처럼 늙어간 나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멀뚱거리다 밀어둔 양재기 더듬어 호두알 깨물면 마른 손가락 같은 밤이 슬플 때가 있습니다 댓돌 가지런한 신발처럼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시한이까지만 살기로 한 통나무집 정짓간에서 각시는 마른 북어라도 두드리는지 텅텅 바람벽 울리기도 하는 겨울밤입니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밥 - 육근상 산동네 겨울은 낮이 짧아요 점심 먹고 장작 조금 패면 금방 어두워져요 대밭에 눈발 해끗해끗 날리기에 자작나무 숯불 끌어모아 곱창김 몇 장..

한줄 詩 2021.12.21

변신 이야기 - 김수우

변신 이야기 - 김수우 남부민동 산복도로 골목 점집 간판이 많다 신을 닮은 먼지들과 먼지를 닮은 신들 천궁으로 갔다가 용궁으로 갔다가 아씨가 되었다가 할매가 되었다가 보살을 부르다가 도깨비를 부르다가 몸을 바꾼다 장롱 밑에서 찬장 속에서 까치발 한 흰 먼지들, 언제 어디서나 부푼다 피란민 꿈속에서 앉은뱅이책상에서 깨금발 뛰던 푸른 먼지들, 마을버스에서 구멍가게에서 오늘도 구르며 집세를 걱정하고 곰팡이를 걱정한다 확, 걸레질로 닦아내도 다시 차곡차곡 내려앉는 저 기도들 걸레로 변신한다 닦아낸 자리마다 맴도는 저 신앙들 비딱한 봉창으로 변신한다 설화신궁 도깨비동자 용왕장군 아씨당 불사대신 천상선녀 작두장군 백궁거사 천궁도인 천상대감 이화보살 할매당 약명도사 애기설녀 흩어지며 뭉쳐지며 옹기종기 모여 앉는 탯줄..

한줄 詩 2021.12.20

고독사 - 이문재

고독사 - 이문재 눈이 오시려나 노인은 굽은 허리에 양손을 대고 한껏 날 선 능선을 바라본다 촘촘한 침엽수들이 잘 발라낸 생선 가시 같다 올려다보는 것이지만 뒤돌아보는 자세 햇살이 기우는 만큼 바람이 한칸 더 습해지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안골에서도 골 끝 꼭대기 집 성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아궁이에 솔가지 가득 집어넣었는지 굴뚝 연기가 푸짐하다 안골 안쪽으로 솔가지 타는 냄새가 번져나간다 새끼 노루 쫓는 발걸음처럼 어둠이 잰걸음으로 골 안으로 들어선다 시린 눈 냄새가 타다닥 불 냄새를 와락 껴안는다 눈이 와서 사각사각 쌓이는 산골이 새하얗게 어두워진다 식은 밥 더운물에 말아 백김치 얹어 먹는 밤 대설주의보가 산맥의 동서로 길게 드리워진 밤 툇마루 바로 앞에서 길이 끊기는 밤 전신주가 띄엄띄엄 지워..

한줄 詩 2021.12.17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때 - 강재남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때 - 강재남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이다 일시에 터지는 빛이라는 거다 태양이 쓴 문장을 읽는다 흰 그림자를 가만히 본다는 거다 누군가 그리워하기 좋을 때다 골목 너머로 시간이 진다는 거다 울음 닮은 침묵이 골목에 박제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과 약속을 한다는 거다 빛이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익숙해지는 것들에 마음을 내려놓고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을 말린다 그림자의 휴식처를 궁금해 말아야 한다는 거다 가장 낮고 초라한 곳이어도 그래 그럴 때도 있지 담담해진다는 거다 훌쩍 자란 계절의 뼈를 만진다 제 색으로 눈물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거다 수선화 라일락이 지고 봉숭아 씨앗이 여문다 사람이 사람으로 되돌아온다는 거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달을쏘다 내가 ..

한줄 詩 2021.12.16

꽃무늬 흉터 - 박지웅

꽃무늬 흉터 - 박지웅 서랍 안쪽에는 세상이 모르는 마을이 있다 속으로 밀어넣은 독백들이 저희끼리 모여 사는 오지 먼 쪽으로 가라앉은 적막에 새들도 얼씬하지 않는 바람마저 알아차리지 못한 그 외진 길에 편지 하나쯤 흘러들었을 것이다 서랍에 손을 넣으면 독백은 내 손을 잡고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종종 과일이 사라지는 것은 마을에서 손이 올라온 것 내가 먹은 그리움에는 왜 뼈가 나올까 누군가 파먹은 사람의 안쪽 가만히 문지르면 흉터는 열린다, 서랍처럼 가끔 그곳에서 곡소리가 난다 고백 하나가 숨을 거둔 것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 밖으로 발을 내민 그리움 뼈만 남은 글자들이 꽃상여에 실려 거처를 떠난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흉터는 눈뜨고 죽은 글자들 모든 꽃은 죽어서 눈뜬 글자들이다..

한줄 詩 2021.12.16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夜叉)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허무의 주루(酒樓) - 우대식 봉황성 주루 난간에 자리를 잡고 한여름을 보낸다 휘황한 밤의 색(色) 연암이 ..

한줄 詩 2021.12.15

건강한 노인과 고단한 청년 - 정덕재

건강한 노인과 고단한 청년 - 정덕재 -청년을 우대하는 나라 새벽에 약수터 물을 떠오고 아침에 게이트볼을 치고 점심에 오첩반상으로 끼니를 때우고 30분 낮잠을 즐기는 게 건강비결이라는 여든일곱 살 장만득 씨는 예순 살에 퇴직하고 칠순까지 아파트 경비원을 지냈다 그 이후 17년 동안 돈을 벌지 않았고 중국집 우동 먹을 때 탕수육 하나 추가하는 연금생활자로 살아왔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다진 장만득 씨가 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이십대 중반 청년 하나가 차에 오른 뒤 긴 한숨을 내쉬자 장만득 씨가 벌떡 일어나 청년의 손을 이끌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등록금 절반은 본인이 벌고 아르바이트로 방값을 내는 스물다섯 살 정민수 씨는 서서 졸거나 의자에 앉아 자는 일이 빈번하다 여자 친구 김순미 씨..

한줄 詩 2021.12.15

찾아온 아이 - 김진규

찾아온 아이 - 김진규 그 먼 옛날 죄가 크면 발을 자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발 없는 자의 무릎을 떠올린다 가장 낮은 자세로도 갈 수 없는 목소리 앞 왕의 광장이 넓게 펼쳐진다 그 먼 옛날 다툼이 있으니 가두라 했다 세상은 밤이 되고 밤은 피부가 되었다 깜깜한 배고픔 위로 뼛조각 같은 별이 부서졌다 먼 곳에서 지켜보는 왕의 관음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던 죄가 왕에게 가면 거울처럼 빛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왕을 훔치고 싶었다 굽혀지지 않는 무릎을 가지고 싶었다 바퀴로 세상을 밀어내던 시절에 걷지 못해 낮은 자세로 기어다니던 날들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랬던 것 같은데 내 다리에 모르는 별들이 한참을 돌아나갔다 그 먼 옛날 거짓을 말하면 혀를 태웠다 부모를 위로하면 그 밤엔 혀가 타들어갔다 왕의 혀는 가..

한줄 詩 2021.12.12

잊힌 것들에 대하여 - 송병호

잊힌 것들에 대하여 - 송병호 점점 단단해지는 풋것들로 여름이 출시된다 주 종목은 목줄에 매달린 KF94 마스크 콧등에 걸치고 간다 챙 모자를 치키고 이마를 훔치고 호흡을 고르고 백사장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손 선풍기와 리조트분양광고가 활활 타는 플라스틱 부채 하얗게 절인 눈썹 선의 간기 파도를 건너온 네 별 내 별의 원자재들이다 시인의 시중을 돕던 하청업자였다 올여름 휴가는 남도 다도해 허풍일수록 볼륨을 높이는 법 에어컨 콘센트를 분리하고 초인종을 잠그고 1000cc 키를 꽂고 휴대전화 카카오 내비 검색기를 틀고 새벽을 젖히자 전조등에 달라붙어 실신한 하루살이의 헝클어진 붉은 입술 바퀴벌레가 라면 국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 민박집, 시치미를 뚝 떼고 있네 허름한 재고가 출시된 여분 흠집을 모아서 질 좋..

한줄 詩 2021.12.11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 - 이현승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 - 이현승 극빈이 스케일로 오해되는 순간이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권세에 연연하지 않는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황금을 돌 보듯 한다면 우리는 낮은 연봉에는 불만이 없지만 우리에 대한 대우가 그렇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공익성이라는 말의 뜻을 내몫은 얼만가로 이해하는 당신 앞에서 화딱지가 그것도 미역처럼 끝도 없이 올라오지만 극빈이 스케일이 되는 순간이 있다. 곗돈 떼인 박씨가 한바탕 울화를 쏟아내고는 꼭 그 인간이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그 인간이 그래도 우리집 큰 놈 낳을 적에 미역에 소고기 끊어 왔던 사람이라고 두둔할 때 성자들이 청빈의 접시 위에 말씀으로 영혼을 살찌우듯 없이 살아와서 가지는 것의 짐스러움을 멀리 한다거나 요강이나 재떨이도 영물처럼 여기는 마음일 때가 그럴 ..

한줄 詩 2021.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