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김선우

마루안 2021. 12. 23. 21:39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김선우
-구름에게 배운 것


구름이면서 구름들이지
지금의 몸을 고집하지 않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지

두려움 없이 흩어지며
무너지고 사라지는 게 즐거운 놀이라는 듯
다시 나타날 땐 갓 태어난 듯 기뻐하지
그게 다지 
곧 변할 테니까

편히 잠들기 위해 몸을 이동시키는 법을
나는 구름에게서 배웠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도

그러니 즐거이 변해가는 것
내가 가진 의지는
그게 다지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 3 - 김선우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등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노력에 관하여

외로워서 SNS가 필요한 것인지
그로 인해 더욱 외로워지는 것인지
네, 간단치 않은 문제로군요 좀 더 생각해봅니다

음모의 발명과 음지의 발굴, 심판의 욕망에 관해서도
손쉽게 전시되고 빠르게 철거되는 고통의 회전율에 관해서도
공유하고 분노한 뒤 달아오른 속도만큼 간단히 잊히는 비참의 소비 방식에 관해서도
늘 새로운 이슈가 필요한 삶의 소란스러움과 궁핍에 관해서도
가벼워지는 눈물의 무게, 그만큼 식어가는 녹슨 피의 온도에 관해서도

네, 정말 간단치 않네요
몸 없이 몸을 이해하는 일처럼
아니, 그보다 몸 없이 몸을 그리워하는 일처럼

 

 

 

 

# 김선우 시인은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내 따스한 유령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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