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나는 행인 3이다 - 김추인

나는 행인 3이다 - 김추인 -호모 사피엔스의 幻 여기는 다중 우주, 다중의 내가 포착되는 교차로다 틀림없다 저 뒤태의 낯익음 민망스럽고 들키고 싶지 않은 저 어정쩡한 면상의 각도 나의 행색을 패러디한 나의 면상에 환을 친 그가 광화문을 횡단하고 있다 발밑에, 출구 없는 동굴이 있을 것이다 입구는 멀고 출구는 지난해야 한다는 그래서 문은 늘 손닿지 않는 아득함이 덧쌓인 그리움일 것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을 따고 들어가 그 생각의 행간에 마땅치 않은 내 사유물을 접어 넣었음에 틀림없다 저 우그러진 표정 뒤에 내가 숨어 있음이라는 유추성 판단이 조립되는 것만 봐도 기시감의 골목, 솟을대문 앞이다 쫄바지를 입은 6살 상고머리 아이의 낯짝은 닫힌 문 안인지 내내 뒤통수뿐이다 시간의 세포들 매 순간 찌들..

한줄 詩 2021.12.10

빠진 나사 - 김승강

빠진 나사 - 김승강 나사가 하나 방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디서 빠진 놈일까 빠진 나사를 주워들다 말고 엎드려 장롱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동전이 몇 닢 떨어져 있다 동전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나 내가 모르는 새 뭔가 은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불안하다 아직 일상은 별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다 나사 하나를 잃은 그는 자기 몸에서 나사가 하나 도망갔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알게 된다면 일상은 어떻게 변할까 불안했던 이유를 알겠다 빠진 나사 때문이다 빠진 나사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길바닥을 유심히 살펴봐라 집을 뛰쳐나온 개들이 길거리를 몰려다니듯 빠진 나사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드디어 저녁 뉴스 자동차가 한 대 길 위에서 찢어졌다 빠진 나사 때문은 아닐까 제 자리를 찾아주려다 포기하고 던져버린..

한줄 詩 2021.12.09

그렇게 아슬하게 - 박남원

그렇게 아슬하게 - 박남원 어떻게 살았겠는가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런 힘겨운 이야기들.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과 대답을 뒤로 하고 술자리도 파한 자리 나는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엔 퇴로 없는 쓸쓸한 내 옥탑방으로 귀환하게 되지. 지독한 몸살 기운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후미진 골목까지 따라와 마지막까지 애써 배웅해주던 아슬아슬한 저 가로등 불빛. 그 불빛마저 뒤로 하고 텅텅거리는 외부 철계단을 거슬러 올라 싸늘한 냉기 감도는 방바닥에 발을 들이면 살아도, 살아도 결국 이곳은 이방인의 낯선 자본주의였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이야기들. 그래도 못다 한 말들은 어쩔 수 없이 밤하늘 먼 별들에게 돌려보내고 언제나 뒤에 남겨진 채 버텨보지만 숱하게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이 늘 있는 우리의 일..

한줄 詩 2021.12.09

밥숟가락에 대한 단상(斷想) - 김용태

밥숟가락에 대한 단상(斷想) - 김용태 운명이라는 게, 늘 과녁 한가운데로 날아가 박히는 화살 같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재주 비상하여 삐져나오던 발톱 애써 감추고 묵묵히 뿔 벼리어 날을 세우던 친구가 뜻 이뤄 법복을 입게 되었다는 소식 전하더니 어느 날 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게 3년쯤 전이다 퇴근길, 동창한테서 전화가 왔다 왜, 거시기 박사 있잖냐, 판사하다 중 된 갸가 오늘 아침 밥 숟가락 놨다고 하더라 도저히 이 세상 하고는 안 맞았는게벼 그날 저녁 꾸역꾸역 밥을 넘기며 드는 생각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산다는 건 결국 손목 들어 입(口) 봉양하는 일, 숟가락 꽉 잡고 놓지 않는 일 아닌가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시립 병원에서 - 김용태 혼자 사는 친구가 입원한 병실을..

한줄 詩 2021.12.06

한끗 - 이정희

한끗 - 이정희 공중이 휘어지면 계절의 한 부분이 꺾인다 휘어짐의 끝은 붉게 익은 홍시 몇 개 달려 있는 것 높은 곳의 가지를 휘는데 튕겨나가며 잘 휘어지지 않는다 그건 감 몇 개를 지켜내겠다는 나뭇가지들의 완고한 힘이다 그들만의 반경이고 외침인 것이다 높은 것들은 다시 높은 것들이 와서 먹겠지만 허공은 한 번의 그 빈자리를 망각한 적 없다 잡아당겼던 힘으로 겨우 이파리만 훑어 민망한 적 있다 나뭇가지들은 휘어지는 일로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무수한 사이와 간극에 함몰된 긴장을 허공으로 튕겨 내려했을까 불안의 간격 그 갈라진 틈 사이 한끗으로 비켜간 안도가 수북하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결국 바닥의 것이 되겠지만 휘고 또 휘어지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생명이 있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꽃의 폐..

한줄 詩 2021.12.06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 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 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 전생이로구나 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 저 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 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 그것을 꺼내보는 일 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 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보내어보는 것 피 묻은 그것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 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이 햇빛 - 이윤설 나에게 닿는 이 햇빛은 얼마나 멀리서 왔는가 이 빛의 실마리 끝을 잡아..

한줄 詩 2021.12.05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새벽 3시, 잠이 안 와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누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 같다 거실에 켜진 불이 후광이 되어 인체 비례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신장과 같다, 라는 비례를 통한 인체의 구조는 이 새벽에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슬픔의 크기와 같다, 라고 수정되었다 그게 아니면 그 시간에 담배를 빼물고 연기를 내뿜을 리 없다 그게 아니면 나 역시 왜 그 시간에 깨어나 당신을 보는가 캄캄해져야 시야의 회복이 가능하다면 극장에 간 횟수만큼 회복됐어야 했다 불이 꺼지면 회전하는 지구가 보이고 우주에서 날아온 유니버설 로고가 지구를 에워싸는가 싶더니 차르륵, 소리와 함께 필름이 끊겨버린 악몽 뭔가 잘못됐다는 이번 생의 오프닝 크레딧 지..

한줄 詩 2021.12.05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 강건늘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 강건늘 허연 쌀알 하나 서쪽 하늘에 떠 있는 저녁 한강변을 뛰다 길 한가운데에 멈춰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작은 여치 한 마리 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낯선 땅 위에 서 있는 낯선 가느다란 초록색 다리 스쳐 지나가는 이 바람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여치의 생각을 똑같이 따라하고 스쳐 지나가려던 바람도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뒤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여치는 짓이겨져 있었다 나비가 날던 곳 아이들이 뛰놀던 곳 여치를 짓누른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시집/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달아실 나는 밤마다 별들을 걱정한다 - 강건늘 언제부터인지 나를 부르지도 않고 소식조차 없는 나의 작은 별들 가만히 보니 아물아물 앓고 있다 바들바..

한줄 詩 2021.12.02

별, 아버지의 침상 - 최규환

별, 아버지의 침상 - 최규환 별은 멀고 아득했다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의 시간을 통과하여 눈에 닿았을 때 나는 그보다 먼 직선의 별을 상상했으나 이미 소멸된 화석이었으니 그리 오래된 일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별이 통과하는 직선과 공간의 새벽에서 흐느적거렸다 고열이 시작되는 온도에 맞춰 빛은 방 안 가득 선명했고 숨을 오랫동안 지켜내고 있었다 별은 직선과 허공에서 수천억 광년을 거슬러 씨앗을 빚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얼룩이 찌든 침상에 누워 천명(天命)을 이룬 돌이 되어갔다 고름을 힘껏 쏟아내고 난 후 시간 밖에서 빛을 다듬었던 것이다 닿을 수 없는 행성 밖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천천히, 그리고 또렷한 화석이 되어 별의 화상(畵像)을 빚어내고 있었다 옥수수 껍질 벗기듯 아버지를 돌아 눕힌 ..

한줄 詩 2021.12.02

밀려난 것들 - 김주태

밀려난 것들 - 김주태 특별시에서 인구 십만 도회지로 밀려나 술잔을 채운다 족발 뼈다귀 뜯으며 빈 소주병 일으켜 세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노점상 아줌마는 자릿세 걱정이고 이 도시에서 조금만 고생하면 시의원 명함 하나 내밀 수 없겠냐고 안경 너머 불안한 눈빛 시베리아 어느 산등성이 얼음 같은 술잔을 부딪친다 찬바람 불고 눈보라 이는 겨울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절룩이며 떠났던 땅 외발로 돌아온 네게 쏟아 붓고 싶은 말들 오물거리는 목구멍으로 따뜻한 어묵 국물 삼킨다 늦은 밤 구겨진 지폐 밤거리에 지불하고 돌아오는 길 무너진 담장 아래 고개 숙인 수국 기울어져가는 담벼락 구부러진 허리에 희미한 달빛이 붙어 있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간간이 벌어 근근이 살아간다 - 김주태 한파가 오면 긴 겨울잠에 ..

한줄 詩 20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