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마운 일 - 김주태

마루안 2021. 12. 26. 19:04

 

 

고마운 일 - 김주태

 

 

아이들이 어릴 때 이 동네로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

이름 없는 잠바를 입고 이이들은

즐겁게 힙합을 따라 했고

가끔 먼 곳으로 떠날 꿈을 꾸다

돌아오는 날이면

집을 잃은 큰 개가 현관에 버티다 끌려갔다

또래들은 하나둘 골프장으로 가고

땅을 보러 다니고

동네 사람 반이

신축 아파트로 옮겨 갔지만

우리에겐 늘 넉넉한 저녁이 있었다

코코넛을 씹으며

딸은 누구나 가는 대학을 고르는 중이고

점심 먹고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다

아내와 나는 낡아가는 외벽처럼

아무리 닦아도 빛나지 않은 돌처럼 굳어간다

이런 것이 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아버지 - 김주태

 

 

남의 사과밭에 들어가 익지도 않은 풋사과를

작대기로 내리치다 주인한테 들켜

개처럼 맞고 집에 오자

아버지의 매는 더 뜨겁고 시원했다

자취할 때 주말에 집에 돌아와

남의 깨밭에서 사르르 깨를 털어다가

막걸리나 라면으로 바꿔 먹으며 청춘을 보냈다

내 다 안다 객지살이 많이 팍팍하다는 거

도대체 뭐가 될라 하노

군대 갈 때 나는 첫차로 떠났고

아버지는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시외버스 정류장을 수천 바퀴 더 돌았다 한다

막차마저 보내고 걸어서 집에 갔다 한다

직장 잡고 애 낳아 한시름 덜었나 싶었는데

무슨 일 하다 검사한테 조사받고 나왔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오신 아버지

새끼들 달아놓고 어쩌려고 그러노 하시더니

며칠 전부터 누워도 앉아도 어지럽다 해서

병원에 가시자 하니

살 만큼 살았는데 뭐 하러 병원에 돈 갖다주냐며

강제로 팔을 잡고 어깨를 안아도

뿌리치고 소리치고 난리다

아이고, 아버지 어쩌려고 이러시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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