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맹그로브 나무 - 정세훈

마루안 2021. 12. 22. 22:15

 

 

맹그로브 나무 - 정세훈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흙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
진흙 위에 뿌리를 내린다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제 뿌리로 제 한 몸 겨우 지탱하지만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
서로의 뿌리로 서로의 몸을 지탱해준다

자리를 잡은 곳이 온통 진흙투성이여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맹그로브 나무들
제각각 흩어져 뿌리를 내리면
이내 모두 쓰러져 죽어버릴 맹그로브 나무들

모두 모여 함께 뿌리를 내려
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엮어간다
한 그루 두 그루 열 그루 백 그루
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심어간다

세세연년 맹그로브 숲을 우거지게 한다

 

 

*시집/ 동면/ 도서출판 b

 

 

 

 

 

 

동면 - 정세훈


전철역엔 함박눈 대신 스산한 겨울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출근길을 적시었던
때아닌 겨울비가
깊은 밤 뒤늦은 귀갓길 광장에
번들번들 스며들고 있다

가까스로 빗방울을 털어낸
고단한 발길들
승산 없는 생의 승부수를 걸어놓고
총총히 빠져나간 불빛 흐린 전철역사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듯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얼어붙은 노숙자의 잠자리를
실금실금 파고들고

정해진 궤도를 따라 달려온
마지막 전동차
비 젖은 머리통을 숨 가쁘게 들이밀고
들어온 야심한 밤

생이 무언지 제대로 젖어보지 못한
우리들의 겨울날은
때아닌 겨울비와 통정을 하며
또다시 하룻밤 동면에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