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별의 편지 - 이윤설

마루안 2021. 12. 26. 18:53

 

 

어느 별의 편지 - 이윤설


우리는
사막의 절반을 지나왔으니
이 기후가 바뀌어도 이젠 좋겠다 우주는 먼 시간을 돌아 순환한다는데
화석이 부서져내리며
이제는 내 차례가 되어도 좋겠다
하늘이 준 눈물과 마른 땅이 고요히 입맞춤하는 계절이 나의 별에 시작되어도
좋겠다 그 사막의 폭풍이 지나가는 길에
나는 죽은 나뭇가지로 모래에 귀를 대고 누워 있었으나
누운 채로 오래도록 뜨거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최초의 나무가 시작되는 것을
당신이 숲이 되어 치마를 끌고 나와
그 치마폭에 나를 주워가줄 것을 알고
내 가지는 내 뿌리가 될 것을 알고
떠났던 잎들과 비와 향기로운 바람과 함께 당신이 오기 쉽도록
모닥불을 피우고 별은 양치기를 찾아 줄지어 떠나가는 하늘 아래
이 사막은 모래를 모두 쏟아버리고 맑은 유리잔 같은
밤하늘 북극성 아래 내가 누워
이렇게 너를 기다려도 좋겠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배우의 역설 - 이윤설

 

 

막이 끝났다

달이 꺼지고

분장실 거울 앞에서 화장가방을 여는데

새장 안의 새가

쇠창살에

목을 매달아

흔들리고 있었다

죽어봤댔자

헤어밴드로 머리를 쓸어올리고

클렌징크림을 둥글게 둥글게 펴발라

퍼렇게 칠한 눈두덩을 지웠다

꿈쩍할 눈이었으면

울기라도 했을 텐데

찍소리도 안 했다

눈썹 문신이 고등어 같은 미화원 아줌마가 바닥을 물걸레로 밀어대면서

힐끔거려봤댔자 공연은 계속된다 내일도

김밥을 욱여먹던 손으로

새장 문을 열어 앞에서 뒤로 활개를 펼쳐

창밖으로 휙 시체를 던진다

달나라에 가면 편지하렴

반달 끝에 목매달아 대롱대롱 흔들리지 말고

돌아와 노래하지 말고

아양 떨지 말고

분장실 거울 앞에서 화장가방을 닫는데

거울로 흰 캡을 올려쓴 천사가 윙크를 하며 날아가는군

미화원 아줌마가 빈 새장 속으로 들어간대봤자

그래봤댔자 이 별은 참 친절하게 차갑다

오늘도 맨얼굴로

분장실을 번쩍 들고 극장 밖으로

뛰어내린다 그래봤댔자

 

 

 

 

*시인의 말

 

축 생일

-크리스마스 예수님과 복숭이 오신 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안 오신 것보다 낫다.

부처님이 오신 것이 안 오신 것보다 낫고

복숭이가 온 것이 안 온 것보다 낫고

내가 온 것이 안 온 것보다 낫다.

인간으로 살아봤고 꿈을 가져봤고 짝도 만나봤고

죽어서 먼지가 될지 귀신이 될지 우주의 은하수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온 것이 안 온 것보다 낫다.

허나 다시 오고 싶지는 않다.

 

2019년 12월 25일

 

*2020년 늦여름, 병세가 악화되어가는 와중에 혹여 시집 마무리를 못하게 되면 이 글로 시인의 말을 대신해달라는 시인의 요청이 있었기에 이를 여기 그대로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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