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 박주하

마루안 2021. 12. 23. 21:23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 박주하

 

 

오래전 지하철 순환선에서
칼갈이를 팔던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뒤집개를 들고 서서
바이올린을 켜듯 칼 가는 시늉을 하던

칼을 들고 다니면 안 되니까
칼갈이의 성능을 보여 줄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그곳에서
귀보다 먼저 가슴에 꽂힌 목소리를

한 번도 잊고
두 번도 잊었는데
칼을 쥘 적마다 떠오른다

홀로 답이 되는 날이면
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칼갈이를 찾는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멀리서 오는 生 - 박주하

 

 

사무치게 걸었다

파묻히지 않으려고

길들은 여전히 정처 없고

 

미련은 악착같이 밤을 쌓아 놓았다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

모두 나의 것이라니

생이 점점 무거워진다

 

봄바람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아주 작은 풀꽃으로 피어야지

길가 어느 모퉁이에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부끄럼도 없이 그대를 기다려야지

그때는 마음이 아니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야지

단 한 번 다정한 눈빛만으로도 행복해야지

 

 

 

 

# 박주하 시인은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96년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