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문을 두드린다 응답하지 않는다 안에서 밖을 잠근다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문을 연다 텅 빈 방이 방을 업고 나간다 못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독실한 내일에 월세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뺨을 지나 옷깃을 지나 한없이 빈곤한 고양이가 트럭 밑에서 비에 젖은 바닥을 꺼내온다 고양이도 생활고를 알까 모과를 떨어뜨린 나무와 아이를 놓친 창문과 종일 식탁보처럼 흘러내려서 백수인 거야 바닥을 다 울고 나면 울음은 또 어떤 바닥을 쳐야 하나 내일이라는 방을 예약하지 않고 갑자기 알게 된 슬픔 앞에 빈방만 놓고 돌아섰다 나도 내 젊음에 폐업 쪽지를 붙이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그 쪽지가 너풀거리는 곳에 흰 꽃 한 송이 두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

한줄 詩 2021.11.30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정치 마케팅과 상품 마케팅에 유혹당하지 않게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에 귀 닫고 눈 감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필요와 정의 타령에 넘어갈까봐 하늘을 봐요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 눈 뜨니 오늘이 있어 없는 날이라 부르기로 해요 없는 날에 할 일은 바람 속에서 시집 몇 페이지를 천천히 읽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을 출생 이전처럼 하는 것 지구가 우주의 일원으로 오늘을 걷고 운 좋게 지구에 탑승한 오십년 차 승객인 나도 지구와 함께 걸어요 지구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 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

한줄 詩 2021.11.30

순간의 바깥 - 이문희

순간의 바깥 - 이문희 내가백합과 목련의 다름을 인정해서 겨울이 왔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사바나를 구글에서 검색하다가 검은 기린 흰 기린을 처음 보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 끝 적도에는 아까시나무와 바오바브나무가 보인다 한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마당엔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향기로운 꽃들이 피었다 지는 사이 사랑의 중심엔 커피가 끓고 있다 침대 모서리엔 남자의 파자마가 걸쳐 있고 어젯밤 쓴 시가 화장대 위에 반쯤 구겨져 있다 검은 기린은 얼마나 고민이 많아 검게 되었을까 왜 나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다시 봐도 검은 기린은 나 같고 흰 기린은 너 같은 나를 꼭 닮은 검은 기린을 생각하면 겁 많은 눈으로 멀리 표정을 살피다 물기 젖은 나뭇잎을 먹고 속눈썹에 잠이 맺혀 별을 당긴다 너를 닮은 흰 기..

한줄 詩 2021.11.29

일기 - 김진규

일기 - 김진규 익숙함 때문에 찢어버린 문구가 어느 날 늑골처럼 아늑하다 느낄 때 영원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보다 더 아름다울 때 그런 날이 누구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 날 어디론가 계속 옮겨 다니는 오늘이 지나 아직은 행복한 내일의 마음을 끌어다 쓰고 발바닥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내 기분을 거기 전부 적어둔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건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등 뒤로 떠나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고 어떤 날에는 며칠쯤 일찍 찾아올 불행을 느낀다 그런 날에는 고작 나도 혼자 뛰어내릴 수 없는 절벽쯤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보지만 허나 발을 구르면 빛나는 비명들에 대해 불이 켜진 방에 가만히 앉아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지난날에는 숙취보다 오래가는 불안함에 대해 꾹꾹 눌러썼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씨 ..

한줄 詩 2021.11.29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 김익진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 김익진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이미 지나간 날들이 얇은 지갑에 묶여 있던 또 하루를 잎이 다 떨어진 산허리 위로 끌고 지나간다 초겨울 추위에 얼어있는 낙엽은 기어처럼 흔들리고 달리는 자동차 울음이 목젖까지 꽉 찬 오후다 삶은 알 수 없는 미래 흑백이거나 흐린 음영으로 별 무리와 함께 가는 길인데 끼워야 할 단추가 너무나 많다 조수와 달이 배합한 삶 회전하는 마법의 순간들은 되돌아갈 길이 없으니 타인에게 말이나 걸어본다 우리는 단 한 번 사는데 이 삶은 북적대는 비둘기장이다 일요일 오후에는 슬퍼할 일들이 너무 많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불면증 - 김익진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면 낮과 밤이 있을까 달이 지구보다 크다면 지구가 달 주위를 돌까 지..

한줄 詩 2021.11.27

그 후 - 박민혁

그 후 - 박민혁 슬픔을 경제적으로 쓰는 일에 골몰하느라 몇 계절을 보냈다. 나를 위탁할 곳이 없는 날에는 너무 긴 산책을 떠난다. 목줄을 채운 생각이 지난날을 향해 짖는 것하며, 배변하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건 거의 사랑에 가까웠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는 식의 문장을 떠올려 본다. 모든 불행은 당신과 나의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온다. 병구완이라도 하듯 아침과 저녁은 교대로 나를 찾아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좋은 냄새가 나는 아기를 안아 주고, 도닥여준다. 아기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인생이 아니라 기어코 비극적이려는, 고삐 풀린 그것을 길들이는, 인간이다. 집에 놀러온 신은 내 일기를 들춰보다가, "신이란 신은 죄다 불량품인지, 뭘 가지고 놀든 작동이 잘 안 돼..

한줄 詩 2021.11.27

길 위의 방 - 홍성식

길 위의 방 - 홍성식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불혹 - 홍성식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눕는다 메마른 얼굴을 쓰다듬는 유년의 바람 해서, 내내 낯선 길만이 매혹적이었다 열아홉, 스트리퍼의 젖꼭지를 본 날 우주는 ..

한줄 詩 2021.11.26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폐막식을 위하여 - 서윤후 ​ 이 무대를 끝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서둘러 빛을 꺼내려고 벼락을 샅샅이 뒤지던 날에 기록한 망가진 그날의 일기가 오늘 무대의 조명을 갖춘다 인형탈을 벗고 쉬는 용서를 보았을 때 지혈되지 않던 밤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함부로 깨웠다가 영영 잠들지 않는 자명종을 목에 걸어주고는 꿈에서만 참견하는 악몽이 되어주기로 한다 익숙하고 끔찍한 친절함으로 골절된 영혼의 인형극에 몰입하며 차례를 기다린 건지도 바닥난 사랑에도 이 무대는 영영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의 독백을 지우고는 삶을 퇴고하게 된다 다음 행복을 모사하는 것도 슬픔이 가진 배역이었기에 머지않은 출구를 열지 못하고 벼랑 끝에 서 있다 무대에 두고 온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누구도 버린 적 없어서 아무도 끝까지 읽..

한줄 詩 2021.11.25

증강현실 - 이문재

증강현실 - 이문재 뛰지 말라 전파를 더 많이 맞는다 가만히 서 있지 말라 몸에 부딪쳐 부서지는 전파가 무릎까지 쌓인다 걸어다니지 말라 옷이 전파에 절어 너덜너덜해진다 살갗이 전파에 맞아 시퍼렇게 멍든다 숨 쉬지 말라 전파가 허파꽈리에 가득 차 딱딱해진다 눈 뜨지 말라 망막 안쪽이 긁힌다 전파 전파 전파가 쏟아진다 위아래 앞뒤 왼쪽 오른쪽 전방위에서 초강력 전파가 쉬지 않고 달려든다 폭풍처럼 폭우처럼 폭설처럼 쓰나미처럼 화산처럼 지진처럼 눈사태처럼 정전처럼 감전처럼 단전처럼 누전처럼 신종플루처럼 광우병처럼 조류독감처럼 구제역처럼 전파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옷을 털지 말라 전파 부스러기 떨어진다 물로 씻지도 말라 전파가 몸을 관통하고 있다 실제 상황이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사랑과 평화 - 이문재 ..

한줄 詩 2021.11.25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머잖아 겨울이 오면 마스크를 벗고 내 반의 얼굴을 드러내도 되나 앙상한 늑골 사이로 주린 바람이 달려가는 도시의 귀퉁이 탁자에 희박하게 앉아 얼큰한 육개장을 마음껏 먹어도 되나 집 냄새에 찌든 사람이 모처럼 노선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묻혀온 무덤이 따로 없더라는 진흙 같은 적막함 여기까지 왔대 느닷없는 소름이 이웃 아파트 단지까지 밀고 오면 나는 뒷문을 하나 더 만들어 놓는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짐승이 들뜬 분위기를 퍼뜨려놓고 이제나 저제나 방심을 기다리는 왕국의 동토 지대를 쏜 살보다 빠르게 건너갈 수 있나 만화경을 돌린 듯이 모든 걸 헝클어버린 이간질 같은 안개 숲 기울어진 것은 균형을 찾으려 수십 번은 흔들리고 자작나무처럼 하얀 껍질을 벗으면 그 사이 몇..

한줄 詩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