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택배 - 최규환

마루안 2021. 12. 26. 19:12

 

 

택배 - 최규환

 

 

파업이 끝났고

눈을 밝게 비춰줄 스탠드가 도착했다

삶에 대한 밝은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데

상자를 놓고 간 그에 대한 이해는

파업이 끝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기슭에서 보내온 늙은 어미의 편지

혹은 잠든 아이를 뉘이며 막차가 끊어지기 전 돌아오겠다던 마음이

혹은 깡마른 놈과 눈이 맞아 짐을 싼 아내를 포기해버린

또는 고독사를 준비하며 남은 며칠을 더 살고 있을

아니면 치솟는 집값에 사랑을 포기한 청춘이었을

그런 택배

 

절체절명의 속속들을 문 앞에 두고 간 통로엔 바람이 서성거렸고

파업은 끝났으나

기한 없는 삶으로 인해 빈 상자의 여운과 마주하는

기막힌 이 시대의 허기

 

나는 조금 더 두툼하게 스탠드 밝기를 조절한 후

별수 없이

간격 사이에 허망한 그림자를 앉혔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 최규환

 

 

나를 잊은 한 사람의 눈에선 눈물이 고여 있다 하루의 끼니를 벌어먹는 늙은 대리기사의 왼쪽 다리는 비대칭이었고 수천억을 가지고도 소독약 하나 제 손으로 못 바르는 노인은 오늘의 증권시장에 평생을 바쳤다 말귀 어두운 어머니는 통화가 시작되고 끝이 날 때까지 몸조심하라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늦은 저녁 망포동 술집에서 사는 게 힘들다는 친구의 전화가 왔고 지하철 좌석엔 젊은 여자의 토사물로 얼룩이 들었다 비가 내렸고 늦은 밤엔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이 명치에 내려 앉았다

 

 

 

 

*시인의 말

 

오랜 기간의 공백이었으나

멀지 않은 날들의 기록이다.

예민하지 못했던 삶에게 값을 치르는 시간이었거나

스스로 익숙해지는 허물이었다.

 

보이는 것은 뭐든지

감춰진 내막으로 번져 있다.

 

내 언어가

세상의 소리를 읽다가

낮게 엎드리는

사소한 흔들림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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