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아름다운 독선(獨善) - 서정춘

아름다운 독선(獨善) - 서정춘 그러니까, 나의 아름다운 봄밤은 저수지가 말한다 좀생이 잔별들이 저수지로 내려와 물 뜨는 소리에 귀를 적셔보는 일 그 다음은, 별빛에 홀린 듯 홀린 듯 물뱀 한 마리가 물금 치고 줄금 치고 一行詩 한 줄처럼 나그네 길 가는 것 저것이, 몸이 구불구불 징한 것이 저렇게 날금 같은 직선을 만든다는 생각 그래서는 물금줄금 직선만 아직 내 것이라는 것 오 내 새끼, 아름다운 직선은 독선의 뱀새끼라는 것 *시집, 귀, 시와시학사 봄밤 - 서정춘 어렵사리, 나는야 조랑말을 부리는 말집 큰말집 아들이었지러 어느 봄날 실비 그치고 일없는 해질녘 윗말집 아랫말집 또 작은말집 어른들은 고의춤에 손 넣고 우리집 바깥 측간이 딸린 마굿간 옆을 오종종 앉아서 탱탱한 가짓빛 말좆 세우느라 그 눈빛..

한줄 詩 2017.05.01

봄산 - 허연

봄산 - 허연 볼품없이 마른 활엽수들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사연들이 있어 봄산은 슬프게도 지겹게도 인간적이다. 아무것도 감추지 못하는 저 산들은 세월 흘러 우연찮게 모습을 드러낸 도태된 짐승들의 유해이고, 그 짐승들을 쫓다 실족한 1만 년쯤 된 가장의 초라한 등뼈다. 이제 싹을 틔우려고 하는 불온한 씨앗들의 근거지, 원죄를 뒤집어쓴 채 저 산에서 영면에 들어야 했던 자들의 허물 같은 것이다. 기껏 도토리 알이나 품고 삭아가는 노년기의 山 앞에서, 봄에 잠시 드러나는 山의 한 많은 내력 앞에서 못 볼 것을 본 듯, 이 초저녁 난 자꾸만 가슴을 두드린다. 기적은 오지 않겠지만 저 산은 곧 신록으로 덮일 것이고, 곧게 자라지도 단단하지도 못한 상수리들은 또 사연을 만들 것이다. 산은 무심해서 모든 것들의 ..

한줄 詩 2017.04.17

복사꽃 화전(花煎) - 김명리

복사꽃 화전(花煎) - 김명리 복사꽃 철 맞아 소풍을 갔더랬다 나무에 기대어 서서 봄날은 간다~ 누군가 휘파람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었는데 복사꽃 그늘 속으로 마음 몰아치던 저 봄날 뺨이 패이도록 올해의 봄바람은 더욱 사납고 그해의 복사꽃은 죄다 져버렸으니 남아 있는 향기로 화전이나 부칠까 어쩔까 하는 사이 서러운 그이들 뿔뿔이 떠나고 화톳불 삼킨 듯 봄꽃의 속내는 달아오르고 비 듣는 윤사월에 턱 고이고 앉은, 세월은 사무치는 사람의 가슴에 몇 점의 붉은 핏방울로 복사꽃을 새겼다 *시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문학과지성 綠雨 - 김명리 4월의 비는 채 꽃송이 벌지 않은 백합나무와 아직은 연푸른 落雨松, 몰아올 낙엽과, 침엽의 두근거림 사이에서 시작되지 청도 지나는 봄빛, 헐티재 너머 각북에 내리는 저 ..

한줄 詩 2017.04.12

벚꽃 개화 예상도를 보며 - 손택수

벚꽃 개화 예상도를 보며 - 손택수 서귀포에 벚꽃이 피는 건 3월 17일, 어머니 사시는 부산 이기대 바다는 23일이다 이기대 언덕에서 수목장을 한 아버지의 벚나무는 예상대로라면 그날 피어날 것이다 바다를 건너오는 데 무려 일주일이나 걸리다니, 벚나무는 동력선이 아니라 옛날 방식대로 돛단배를 타고 오나보다 그 일주일 동안 어머니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겠지 이제나저제나 벚나무에 상륙할 꽃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세상에는 꽃의 속도로 잊어야 할 것들이 있어서, 꽃의 속도가 아니면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 대꽃 - 손택수 꽃을 참는다 다들 피우고 싶어 안달인 꽃을 아무 때나 팔아먹지 않는다 참고 있는 꽃이 꽃을 더 예민하게 한다면 피골이 상..

한줄 詩 2017.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