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어떤 흐린 가을비 - 류근

어떤 흐린 가을비 - 류근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 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 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한줄 詩 2017.11.03

가을비 - 이은심

가을비 - 이은심 하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만 중얼거린다 오후 세시에 불려나온 그대는 젖은 꽃잎 위에 아슬히 서 있다 이름 모를 마을에서 점심을 먹는다. 처음 들른 식당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끓여주는 국밥 한 그릇. 들여다볼수록 낯선 그 처음을 수저질하며 버즘나무 이파리가 큰 새처럼 떨어지던 가을을 생각한다. 한 번의 환희와 수십 개의 절망이 소리 높여 휘몰아치던 격정의 순간들을. 편두통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휘파람 같은 가을, 그 깊은 곳에 서서 이제 그대가 나의 그리움이 되면 안 되나. 실성한 사람 하나쯤 키우고 있을 법한 마을에서 그대가 나의 처음과 나중이 되면 안 되나. 오후 세시에 상벌(賞罰)처럼 가슴을 때리고 가는 입술 새파란 비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가을 - 이은..

한줄 詩 2017.10.03

죽음 놀이 - 홍신선

죽음 놀이 - 홍신선 밤새워 낚은 잡고기들 다시 놓아준다 중환자실인 양 밑바닥에 죽은 듯 엎드렸던 참붕어나 배때기 뒤집고 혼절해 뜬 몇몇 누치들 비실비실 빠져나간다 올 밴 어망이 목숨 가지고 놀던 그 손아귀를 힘껏 열어주었다. 놀이판에서는 부가가치 큰 목숨 놀이가 제일이라고 했나 대안 병원에 일단 입감하면 결국 죽어서야 풀려난다는데 다섯 칸짜리 낚싯대 접으며 나는 수금했던 잡어들 공으로 쉽게 풀어준다 드넓은 수면에는 새벽이 희부연 등짝을 엎어놓고 떠올라 있다 막 풀려난 저 씨알 굵은 한밤 동안의 노역 몇 수, 갓 봉사 나온 호스피스같이 헐뜯긴 상처 침칠로 쓰윽 쓰윽 햝아주는 물결들에게서 통증 식히고 있거나 결리고 쓰린 몸 안에서 시간의 장독 뽑아내는 일 잠깐이리라 놀이 가운데 가장 판 큰 놀이는 죽음 안..

한줄 詩 2017.09.29

층간 소음 - 전성호

층간 소음 - 전성호 지붕 위에 지붕 위층에서 팬티 바람으로 세수하고 아래층에서 속옷 갈아입고 조간신문 읽는다 식사를 하고 아래층에서 똥은 눈다 베란다 유리창마다 번들거리는 햇살 사이 진공청소기 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피아노 두들기는 소리 불협화음도 화음인가 엇물리는 사소한 것들이 칼부림하는 저녁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계단을 타고 오를 때쯤 똥개가 짖어대고 노부부가 커튼을 연다 밤이면 구름 깃에 묻힌 달 팔뚝을 빤 모기가 집집의 장딴지를 공격하러 간다고 소식을 전해 올린다. *시집,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실천문학사 솜방망이 꽃 - 전성호 어린이 놀이터 풀숲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침이면 할아비 손에 엉깃엉깃 끌려온 진돗개 굽은 허리로 배설 마친 뒤에야 하루가 일어선다 아이들 맞을 빈 모래판 깨작거..

한줄 詩 2017.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