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열차가 지나가는 배경 - 강인한

마루안 2017. 4. 17. 20:31



열차가 지나가는 배경 - 강인한



벚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그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지나간 청춘처럼 등 뒤로 열차가 지나갔다
벚나무 가지에는 잘 익은 바람이 찰랑거리고
바람들은 여기저기 작은 파문을 일으켜 잎을 떨구고
여름 가고 가을이 갔다
벚나무 아래
벚나무의 그림자처럼 그가 서 있었다
한 떼의 소란스런 눈보라가 스쳐 가고
이른 봄 파아란 강물이 벚나무에서 흘러나왔다
벚나무에서 나온 강물은
그 일대의 쓸쓸한 배경을 적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강 건너로
쓸쓸한 배경처럼 청춘이 지나갔다 어느 날은
비를 맞으며 벚나무 아래 강둑에 그가 서 있었다
벚꽃이 피고 파아란 강물 위로 문득
새가 날아올랐다 눈이 예쁜 작은 새 한 마리
벚꽃 흰 그늘에 다리 오그려 쉬고 있었다
입술 붉은 물고기들이 웃으며 강물에서 뛰어올라도
벚나무 아래 그는 오지 않았다
봄 가고 다시 여름이 오고
강이 마르고 벚나무 이파리가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벚나무는 제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서쪽 하늘 붉은 강 위에
벚나무 검은 그림자가 떠서 흐르고 있었다.



*강인한 시집, 입술, 시학사








내 손에 남은 봄 - 강인한



부드러운 능선의 칼금을 문 하늘 위로
제비가 왔다, 생일이면
내 전생에 상제의 딸을 엿본 죄로
여기 서서
 

담 너머 눈부신 향기가 날아오고
영롱한 구슬소리가
종일토록 늙은 벚나무 꽃잎을 털어
목욕을 마친 그대 속살의 분홍
그대 속살의 향긋한 흰빛을
다 비춰줄 때까지
기다린다
 

후생의 내가 살아
바라보는 스스로의 옷이 문득 낯설고
오랜 기다림에 목이 말라
자꾸만 거울을 보는데
뒤꼭지 까만 밤이
발을 적실 듯 길게 흘러나온다
 

사랑이여, 펼치고 펼쳐서
내 손에 남은 봄이
이제 많지 않다.






강인한 시인은 1944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1966년 첫시집 <이상 기후> 이후, <불꽃>, <전라도 시인>,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푸른 심연>, <입술> 등이 있다.


# 나이가 들수록 봄이 짧다고 느낀다는데 이 시를 읽으며 나 또한 그렇게 느낀다. 갈수록 봄은 힘들게 오는데 꽃잎도 떨구지 않았는데 봄은 저만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시인의 봄도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