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틈으로 보다가 문 열고 보니 - 성선경

마루안 2017. 4. 17. 20:22



문틈으로 보다가 문 열고 보니 - 성선경



그랑께, 아내가 동창회를 간다 하네
생각도 없이 뭐가 필요한가 물었거든
생뚱맞게 명품가방이라 그랬거든
생각도 없이 한 말에 카드를 그었거든
나는 참 기특하다 생각했거든
돌아오면 뭐 좋을런가? 했거든
해도 한참 남은 저녁에
문을 왈칵 열고 아내가 들어오거든
동창회를 벌써 마쳤나 물었거든
대답도 없이 쑥 들어가 버렸거든
뭐 가방이 맘에 안 차 그런가? 했거든
그랑께, 확 돌아앉으며 한마디
이 나이에 영감 있는 년은 나뿐이랑께!
얼마나 숨이 콱 막혀왔는지 모르거든
그랑께, 아내가 동창회를 간다면
생각도 없이 뭐가 필요한가 묻지 말든지
생뚱맞게 명품가방이라 못 들은 척하든지
생각도 없이 카드 긋지 말든지
뭐 좀 좋을런가? 기대하지 말든지
뭐라 그래도 묻지를 말든지
아무 말도 묻지를 말든지
아직 해가 남은 저녁에는
해가 아직 한참 남은 저녁에는.



*시집, 석간신문을 읽는 명태 씨, 산지니








낮말은 새가 듣고 - 성선경



토요일이었고 남편이 누워 TV를 보는데
아내는 자꾸 TV 앞에 얼쩡거리고
남편이 참다 참다 한마디 하는데
―어디 김장독만 한 엉덩이를 자꾸
아내는 화가 나서 휙 돌아보는데
남편은 그 꼴을 보고 다시 한마디 하는데
―다시 봐도 김장독이네
아내는 잠자코 베란다로 나가는데
묵묵히 빨래를 개키는데
이윽고 저녁이 와서 밥을 먹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남편이 무슨 생각이 있어 자꾸
아내를 찝쩍대는데 글쎄
아내가 몸을 틀어도 계속
찝쩍대는데, 그러자 아내가 한마디
힘주어 한마디 하는데
―어이! 이 양반아 그 쪼그랑 알타리 무로
―총각김치 담겠다고 김장독을 열 순 없지
토요일이었고 아무 할 일도 없었는데
아내는 자꾸 TV 앞에 얼쩡거리고
남편이 참다 참다 한마디 했는데
저녁이 왔는데 낮 새가 울고
알타리 무로는 김장을 할 수도 없고
남편은 자꾸 작아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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