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피는 봄이 죄인입니다 - 이정자

마루안 2017. 4. 17. 20:19



꽃 피는 봄이 죄인입니다 - 이정자



의무만 있는 본처, 애첩처럼 살고 싶어
헌집 하나 버렸습니다, 버리는 동시 버려졌습니다
아니 놔주고 놓여놨습니다 실은
절체절명의 피 말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글쎄, 그게 화근이었어요
얼마 전 개울가로 나갔더니
갯버들 두 귀 쫑긋 세우며 말하지 않겠어요
산속 깊은 곳에 숨은 복수초 변산바람꽃 얼레지가
햇살을 끌어당기며 점화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덩달아 매화나무 생강나무 진달래 목련이
일제히 싹눈을 틔우며 거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구요
천지사방 열애처럼 꿈꾸던 혁명의 날이 올 거라구요
그래, 나도 겨우내 갇혀 있던 마음속 감옥으로부터
탈옥의 꿈을 벼리었죠, 세상으로 난 길들을 점등하며
가장 순정한 꽃씨 하나 골라 꽃피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아프더군요
그러더니 점차 빈 항아리처럼 평온이 찾아드는 것이었습니다
살았다 싶었지요, 그러나, 저기, 저, 싹트는 새순 하나
이미 어쩔 수 없는 봄의 공범자입니다
죄가 있다면 꽃피는 봄이 죄인입니다



*이정자 시집, 그윽, 문학의전당








초록 눈에 꽃이 핀다 - 이정자



누간가 '사랑해!'라고 발음할 때
나무의 어딘가에 깃들었던
초록 눈이 새순으로 돋아나
팔랑이는 것만 같아서
가슴에서도 꽃이 피어나지,
한 그루 푸른 나무로 출렁이지


입에서 나온 말이 귀로 들어와
가슴을 열게도 하고 닫게도 하는 힘은
초록 눈이 가지고 있지


함부로 내뱉기 어려운
순정한 말일수록
이성보다 감성의 지배를 받는 몸은
직감적으로 진정성의 깊이를 헤아리지


빛도 내지 못하는 말들의 잔치
그 휘발성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