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복사꽃 그녀 - 손진은

복사꽃 그녀 - 손진은 동풍이 팔랑거리는 그녀 치맛단 들어올리자 저 가려운 구릉, 골짜기는 온통 분홍살로 흐벅지다 오살할 년, 가슴팍을 향기의 칼날로 찍었나 천만 개의 입술로 핥았나 내 사내 풀린 눈동자는 분홍물살 보조개에 사정없이 휩쓸리는 중이다 햇살이 능선과 골짜기 다 훑어도 잡아챌 수 없는 화냥끼는 언제 맑은 그늘이 될까 싶잖은 처녀처럼 깊다 더욱 봄비가 저 살들의 다정(多情)을 돋굴 때 채곡채곡 물 재우다 비안개를 거느리다 구름그늘이라도 그 살에 쓸릴라치면 내 사내의 날 온통 갉아먹는 거다 오매 환장할 것, 환장할 것 내 사내 얼굴 목에도 바짓가랑이에도 마구 올라타 닝닝거리는 분냄새 그 보조개 물살로 웃어쌓는데, 어허 언제나 내 쪽은 소란하고 저쪽은 맑은 거다 어떤 아낙의 사주를 받은 늦바람이 단..

한줄 詩 2017.04.10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전부인 - 박용하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전부인 - 박용하 그런 것들을 사랑하리 서울에서의 삶은 환상도, 장밋빛 희망도, 모욕도, 환멸도 개똥도 아무것도 아니다 아닌 것들을 사랑하리..... 이미 한 살 때 어쩌면 더 오래 된 슬픔의 옛날인 내 추억의 폭풍우와 바다인 감히 백 살 때 나는 인생이 빛도 어둠도, 눈물겨운 휴가도 정말이지 눈물겹게 말린 김밥도 소풍가는 도시락도, 너도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전부인 삶의 이슬임을 알았다 아닌 것들을 지독하게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하리..... 서울에서의 삶은 나무도, 나무를 생각하지 않는 자동차도 굴러가는 쓰레기도, 남창도, 탁자도 아무것도 아니다 아닌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너무도 많이 흘러가버린 시간의 햇살과 나이의 자갈밭에서..... *시집,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한줄 詩 2017.03.30

만경강 트로소 - 서규정

만경강 트로소 - 서규정 내세는 있는가, 대체 어느 서쪽일까 온갖 트집을 잡듯이 물결은 굽이치며 출렁이고 굵은 모래가 은하처럼 빛나던 그 강가 장날 팔려나온 닭, 싸움시키다 만나 발음도 시원치 않게 구구절절 외워온 팝송 부르며 볏짚가리 속에서 몇 밤 같이 새운 우리 사건쯤이야, 연극 제목으로 골라 따로 쓸 건 없어도 마른수수깡 씹듯 복수의 이빨은 갈았겠지 시골구석에서 흐느적거리며 살 순 없어 배우가 되겠다고 나서던 등 뒤에서 연극이나 시, 하필이면 밥도 안 되는 것만 찾아 술은 먹는다 앞 강 모래 파, 벽돌 찍어 팔면 그럭저럭 밥은 먹는다 남잔 벼락을 잘 만나야 목발도 날개가 되는 거야 생활을 해야지, 왜 서커스를 찾아 가 놔라 팔 부러진다 역에 나와 팔을 붙들던 화장기 없는 살림꾼 하나 가물거리던 풍경..

한줄 詩 2017.03.30

시간의 손 안에서 - 전대호

시간의 손 안에서 - 전대호 오직 시간만이 우릴 지배하고 있을 때 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심지어 생사조차도 확인할 수 없을 때, 벗이여 잘 보자 시간의 손이 작용하는 방식을, 시간은 모든 산 것들을 갈라 놓고 모든 죽은 것들을 모은다 우리 지금 헤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린 아직 살아 있다 두려움 없이 쪼개지자 우리 산화하지 않은 단면을 보여 주자 보여 주고 서로 용기를 얻자 오직 시간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오직 산 것들만이 갈라진다 가라! 울지 말고.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민음사 별똥별 - 전대호 별똥별이 천구에 한 십오 도쯤 원호를 긋고 사라진다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는 장엄했으리라, 공기를 찢는 그의 속도가 쏟아 놓는 소리 ..

한줄 詩 2017.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