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산 - 허연

마루안 2017. 4. 17. 18:25

 

 

봄산 - 허연

 

 

 

볼품없이 마른 활엽수들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사연들이 있어 봄산은
슬프게도 지겹게도 인간적이다.


아무것도 감추지 못하는
저 산들은 세월 흘러 우연찮게 모습을 드러낸
도태된 짐승들의 유해이고,
그 짐승들을 쫓다
실족한 1만 년쯤 된 가장의 초라한 등뼈다.
이제 싹을 틔우려고 하는 불온한 씨앗들의 근거지,
원죄를 뒤집어쓴 채 저 산에서 영면에
들어야 했던 자들의 허물 같은 것이다.


기껏 도토리 알이나 품고 삭아가는 노년기의
山 앞에서, 봄에 잠시 드러나는
山의 한 많은 내력 앞에서
못 볼 것을 본 듯, 이 초저녁
난 자꾸만 가슴을 두드린다.
기적은 오지 않겠지만
저 산은 곧 신록으로 덮일 것이고,
곧게 자라지도
단단하지도 못한 상수리들은
또 사연을 만들 것이다.


산은 무심해서 모든 것들의
일부고, 그런 봄날
생은 잠시 몸을 뒤척인다. 다 귀찮다는 듯이

 

 

*허연 시집,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목련이 죽는 밤 - 허연

 

 

피 묻은 목도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다 흰머리 몇 개 자라났고 숙취는 더 힘겨워졌습니다. 덜컥 봄이 왔고 목련이 피었습니다.


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꿈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억은 어디서든 터를 잡고 살겠지요.


아시는지요. 늦은 밤 쓸쓸한 밥상을 차렸을 불빛들이 꺼져갈 때 당신을 저주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나갈 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목련이 떨어진 만큼 추억은 죽어가겠지요. 내 저주는 이번 봄에도 목련으로 죽어갔습니다. 피냄새가 풍기는 봄밤.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