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무지개 - 김유석

무지개 - 김유석 점점 사소한 것들이 길을 앞서는군요. 기억 속으로 배웅했던 것들마저 덥석덥석 뒷덜미를 잡아채고 두근거림으로 끝나버리곤 하는 마음의 허공 물기어린 당신의 눈빛조차 자꾸 희미해져 가는군요. 당신의 아름다운 복선, 집 떠나던 송아지의 눈망울로부터 다시 허공에 쓰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꿈들이 읽혀졌는가. 소년을 세우던 언덕은 가을소나기에 쫓기는 중년의 등 뒤로 거미줄을 늘어놓고 방아깨비 같은 소년의 영혼을 기다리는데 당신은 허구, 멀리서 바라봐야만 선명한 물기둥 먹구름을 뜯으며 우는 늙은 소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 이젠 당신이 내게로 오세요. 건너지 못하는 골짜기에 걸터앉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추억해줘요. 물방울의 몸을 빌어 들어 올린 나의 바닥을 저녁햇살로 천천히 ..

한줄 詩 2018.05.15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아버지는 귀를 먼저 지우셨다 기억과 거래하는 족족 귀는 몸에서 떨어져나와 기웃기웃 날아서 반백 년을 도로 넘어갔다, 가버렸다 사라진 귀들, 고흐의 귀가 그랬고 윤두서의 귀가 그랬다 귀만 먼저 날아 먼 세기로 넘어가버렸다 귓바퀴만 남아 헛바퀴를 돌릴 동안 귀가 없어진 아버지의 눈은 까무룩해졌다 아버지는 중년의 딸도 잊고 두런두런 탄식이 풍덩, 수련으로 피어오르는 연못만 바라본다 수련과 연꽃이 구분도 없이 흐드러진 아버지의 동공을 흔들어보지만 좀처럼 오십 년은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는 지루한 하품을 한다 덩달아 후두를 활짝 여는 수련잎 연못의 푸른 동공이 휘둥그레진다 연못은 아무래도 저 눈을 먼저 지울 모양이다 *시집, 우울은 허밍, 문학동네 심심 심중에 금잔디 - 천수호 아버지..

한줄 詩 2018.05.14

객지에 와서 - 김태완

객지에 와서 - 김태완 중림동 사람들은 가슴에 상처를 입어 고통이 뭔지 알고 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중림동이 고향이 아니다 서울의 중심지 서울역이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중림동은 유난히 허허로운 얼굴로 배고프게 들어선 입간판들로 천자만별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새 사람이 와도 반가움이 없는 멋적은 타향 중림동 사람들은 늘 언제 떠날까를 잊지 않는다 고통스러우면 언제고 기차표를 끊는다 벌써 10년째 함바집을 하는 청양집 아줌마 지지리도 못생긴 채로 암팡지게 설거지하는 팔뚝 너머로 묻는다 "언제까지 있을 거유?" *시집, 추억 속의 겨울은 춥지 않다, 오늘의문학사 돈을 세면서 - 김태완 돈을 세면서 남의 돈을 세면서 세종대왕이 훌륭한 분이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지 돈을 세면서 생선 비린내가 나면 ..

한줄 詩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