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마루안 2018. 5. 14. 22:30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아버지는 귀를 먼저 지우셨다

기억과 거래하는 족족 귀는 몸에서 떨어져나와
기웃기웃 날아서 반백 년을 도로 넘어갔다, 가버렸다

사라진 귀들,
고흐의 귀가 그랬고 윤두서의 귀가 그랬다
귀만 먼저 날아 먼 세기로 넘어가버렸다

귓바퀴만 남아 헛바퀴를 돌릴 동안
귀가 없어진 아버지의 눈은 까무룩해졌다

아버지는 중년의 딸도 잊고
두런두런 탄식이 풍덩, 수련으로 피어오르는 연못만 바라본다

수련과 연꽃이 구분도 없이 흐드러진
아버지의 동공을 흔들어보지만

좀처럼 오십 년은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는 지루한 하품을 한다

덩달아 후두를 활짝 여는 수련잎
연못의 푸른 동공이 휘둥그레진다

연못은 아무래도 저 눈을 먼저 지울 모양이다


*시집, 우울은 허밍, 문학동네


 

 



심심 심중에 금잔디 - 천수호


아버지 시신을 파먹고 자란 잔디 사이에서
아버지 시즙을 빨아먹고 자란 잡초를 뽑아낸다
그렇게 순종만 원하던 아버지,
아버지 몸에도 잡것이 있었군요

아버지가 묻히고 나서야
내 몸에 잡기가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건가요
아버지, 차라리 잡초를 두고 잔디를 뽑아낼까요?
아버지의 살갗에 엉겨붙은 저놈들이 잡놈이 아닐까요?
아버지 몸에 뿌리내린
수천수만의 금잔디 금잔디가 나였잖아요?

공사장에서 떨어져
수십 개의 침을 꽂고 누운 아버지 몸에서
처음 우담바라를 발견한 것도 나였고
마지막으로 떨어지던 링거액에서
아버지의 시즙을 본 것도 나였어요
그러니 저 따끔한 금잔디를 심을 자격도 제게 있다고 그랬죠
아버지는 마지막 눈인사로 나를 인정하셨잖아요

아버지는 네모난 침상에서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또 묻네요
얘야, 바늘 잘 꽂혀 있니?




*시인의 말

눈을 감으면
소리의 백발 한 가닥이 잡힌다

늙은 마술사의 손바닥에서
한 귀퉁이씩 뽑아올려지는 손수건처럼
뽑다가 간혹 툭 끊어지는 티슈처럼

저 기척들

여기까지 나를 불러왔다

귀가 있어 나는 거기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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