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중년의 내일 - 문신

마루안 2018. 5. 15. 18:50



중년의 내일 - 문신



내일 아침이 되면
한 켤레의 여명을 동쪽 하늘에 벗어놓고 나는 장문의 여백을 펼치리


하루 일과의 5막이 열리는 아침
먹빛으로 먹어가는 형광등 불빛 가장자리에 잘 다린 넥타이 끝을 조여매고 먼 지인의 장례식에 보낼 구겨진 봉투를 얇게 펴서 부의라고 적으리


애도라는 말이 아내와 아이들의 식탁 위를 젓가락 끝처럼 망설이겠고
밥그릇에 남은 밥풀처럼 아침은 뻣뻣하게 한 톨로 말라갈 것이니


한 아내와 두 아이에게 기대고 잠든 밤들 가운데
어제의 몇 할쯤을 추억으로 새기고 오늘의 몇 할쯤을 비망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평균적인 삶이라고 잠깐 생각할 겨를에
중년의 기울기는 바람의 무게에도 쏟아져버릴 것처럼 저녁까지는 침묵이 남아있을 테고,
옹이가 빠져나간 허공 속으로 침묵은 동그란 새벽을 맞이할 것이니


내일 또한 중년일 수밖에 없으리


다만, 내일 저녁이 되면
아마도 연필심처럼 눈이 멀거나 비늘 같은 생을 일천오백 자의 주술로 봉인해두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시집, 곁을 주는 일, 모악








중년 무렵 - 문신



늦은 밤 불 켜진 집들을 보면 중년이라는 말이 참으로 캄캄하다는 생각


둔한 짐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이십 층 아파트, 몇 개의 불빛이 지그재그로 멀리까지 밤의 층계를 놓는 동안


새벽 두 시쯤 되었음직한 시간에도 불은 새로 켜지고 불은 그만 꺼지고 불은 더러 희밍해지고


어두울 때 가장 밝아서 외롭다는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잔기침의 기척도 없는 중년의 시간


늦은 밤이면서 이른 새벽 무렵이라고, 어중간하게 '무렵'이라는 중년의 사내들처럼 소스라치지 못하는 어둠


하루하루 화석이 되어가는 중년들


지금, 늦은 밤까지 불 켜고 있는 웅크린 집들 같기도 하고, 흐린 달력에 몇 개의 동그라미를 긋는 모나미 0.7mm 볼펜 심지 같기도 한 중년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서 한 줄기 빛을 숭고하게 여며간다는 생각


우두컨한 몇 개의 등짝이 지그재그로 역사를 메워간다는 생각


운율을 잃어버린 마른 문장들처럼 마침표 없이 사는


중년들





# 내 마음대로 시를 읽는 편이라 남의 말 듣고 시를 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시집에 대한 문학평론가 박성준의 아주 적절한 표현에 공감이 간다. <혼자 울기에는 모처럼 늦은 날에는 이를 펼쳐 봐도 좋겠다. 모과나무 그늘 아래서처럼 최소 네 번은 놀랄 준비를 하고 말이다. 그렇게 놀라는 동안 우리는 문신의 약이 되는 시의 진짜 의미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해설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