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군더더기에 대하여 - 유병근

마루안 2018. 5. 14. 22:21



한 군더더기에 대하여 - 유병근



나뭇가지에 새가 날아 앉을 때

바다처럼 출렁이는 나뭇가지를 보았습니다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 새는

이 물결에서 저 물결로 돌아앉으며

파도타기를 하였습니다

새가 앉은 자리가 바다였습니다

뱃고동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먼 바다로 떠나는 새의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어느새 새도 날아가 버리고

떠나버린 새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 그림자에게로 다가서서

그림자조차 될 수 없는 나를 생각했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바닷가에 흩어져 있던 쓰레기더미에서

너풀너풀 들리곤 했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새에게로 가서

나도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른 파도에 죽지 적시며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시집, 까치똥, 작가마을








오래된 벽화 - 유병근



가늘게 침묵하는 수전증을 다독거렸다

미처 헤아릴 수 없었던 일기예보

시시비비의 깊은 구절양장을 지나

허리 낮춘 더듬이와 함께 지나갔다

어둠은 어둠끼리 둥그런 팔짱을 끼었다

찌그러진 줄장미의 터널을 지나

가시에 찔리며 흔들리는 불안전한 실루엣

줄이 끊어진 낡은 계단을 지나갔다

미끄럼틀에 걸린 요령 없는 어둠은

조금 내려앉다가 엎드러지곤 했다

검은 수렁을 짊어진 그가 오고 있었다






# 한 구절 한 구절 읽을수록 마음을 씻어주는 시다. 언제부턴가 연륜이란 걸 믿지 않는다. 나이 먹으면서 지혜와 포용심이 늘고 욕심을 내려 놓게 된다는데 주변을 보면 그 반대다. 노년의 여유보다 심술과 고집이 포용심을 압도한다. 이 시를 읽으며 반성한다. 나이 먹을수록 나이값을 제대로 하겠다고 다짐한다. 욕심 부린 편안한 노후보다 나이값이 먼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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