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햇빛의 구멍 - 김점용

햇빛의 구멍 - 김점용 그가 왔다 오래전에 죽은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타던 낡은 자동차를 물려받아 여수로 설악으로 안면도로 멀리서 나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수십 번을 불러도 오지 않던 그가 젊은 모습 그대로 나를 찾아왔다 오른손엔 붉은 펜을 왼손엔 황금빛 놋 열쇠를 쥐고 왔다 그는 생전과 달리 부끄럼을 많이 타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미안하다는 뜻인지 고맙다는 뜻인지 웃음의 햇살만큼 나는 어두워지고 붉은 펜을 받아 그의 옷에 내 이름을 적어넣었다 놋 열쇠는 받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할 사람 그러나 한번은 뜨겁게 안아주어야 할 사람 두 팔 벌려 힘껏 껴안으니 갑자기 늙어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살 그의 뼈가 내 몸으로 다 흘러온 듯 백발 성성한 햇살 그림자가 조그만 열쇠 구멍이 되어..

한줄 詩 2018.05.14

어떤 개인 날 - 서규정

어떤 개인 날 - 서규정 이슬비는 낯선 땅 아무 데나 발붙이고 산다 저녁을 찾아 나선 아침이 돌아오지 못하는 한낮에 꽃밭 위에 뛰어내리는 소낙비와 만나서 강을 이루고 그렇게 시끌버끌 흘러가서는 무엇에 부딪쳐 넘어졌는지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발목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둥둥 떠 있고 침을 삼키면 목에 가시로 걸린 낮달이 쉽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비늘이 제일로 비싼 세상을 노동자로 살다가 혀끝을 차는 소리 때문에 무너진 한평생의 계급을 위하여 산꼭대기에도 천막집에도 비들이 새 들어오는 이유를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물고기가 찾아나선 강물이 투망에 걸려 돌아오지 않는 세월을 직업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옷은 작업복이라 강은 빨래터를 만나면 제법 깨끗해지겠지만 사람의 숲으로 끼어 들어간 나 하나의 하염없음이..

한줄 詩 2018.05.14

너무 오래 - 이서린

너무 오래 - 이서린 이서린 매일 아침 108배 엎드렸다 일어나며 유심히 바라본 늦가을 마당 그 마당 한쪽에 벚나무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고 있는데 때로는 가볍게 혹은 무겁게 몸서리치는 저 숱한 입술과 입술 하루 한순간 108번 흔들리다 한 며칠 지독한 떨림에도 견디더니 어느 날 몇 번 엎드리다 일어나니 비어가는 가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람 없는 날에도 미련 없이 지는데 어찌 다 알겠는가 나뭇잎 하나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몸부림이 있는지 작은 숨 하나 멈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음 삼켜야 하는지 영영 가는 길이 쉬운 일이겠는가 가는 이나 보내는 이나 이토록 오래 서성이는 것을 *시집, 저녁의 내부, 서정시학 사라진 봄에 대하여 - 이서린 기차가 떠났다. 결핵 3기 분홍빛 얼굴 봄날을 가르며 제..

한줄 詩 2018.05.14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태백시 장성광업소 맞은편 태백중앙병원 611호 진폐증 환자실 한 노인이 사타구니 쪽으로 고개를 구겨놓고 누워 있다 그 병상 옆에 노인을 빼 닮은 쉰 살 넘긴 노총각도 새우등을 한 채 누워 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병상과 병상 사이에 모여 앉아 지상에서 마지막 눈물로 죽음의 층계를 닦고 있다 낡은 엔진소리가 세습된 노총각은 노인이 걸어온 날들을 떠올렸다 빈 도시락에 캄캄한 어둠을 채워 퇴근하던 날 이빨 빠진 사기술잔 입에 물고 낡은 유행가를 부르며 허공에 꿈을 묻어버리던 일 기침소리 골방 가득해도 빈 지갑의 주름을 펴려는 손바닥의 굳은살은 박달나무보다 단단했다 갱도 275km 속에서 수천 년을 침묵하던 검은 돌의 어깨를 곡괭이로 내리찍던 노인의 숨소리는 초침이 돌아갈수록 공터에 버..

한줄 詩 2018.05.14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쑥물만치나 쓰던 날들 속에 일 늦은 아부지 야윈 몫시밥 끝내 훔쳐묵고 말았던 한저녁에 저런 오살 새끼 사람 노릇 당초에 애시부텀 그른 자식..... 마른 목청으로 엄니는 꺽꺽 목이 메이고 말고 등짝 가득 새끼줄처럼 감겨오던 싸대기 몇 찌검을 그래도 견뎌보다가 종내 쫓겨나왔던 사립문 화들짝 밀치면 거기 허기보다 더 높게 뜨고 그보담 더욱 쓰라렸던 눈매 칼칼한 달빛 한 자락 휘영청 동네 끝으로 내쳤던 밤길..... 순간에 살오름 돋던 한기로 으시시 떨려오던 부황든 밤부엉이 소리 어두컴컴한 두어 소절 그런 밤이면 우리 아부지 맹물로 멀건하게 불린 허허벌판의 잠결에 뒤채어 잠 못 이루시던 시린 잠결 너머로 지지리도 더디 왔었던 어느 봄날 어귀 내 무참한 기억 속에 꼭 그 자리..

한줄 詩 2018.05.14

거울 앞에서 - 박승민

거울 앞에서 - 박승민 스무 살 때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란 여자의 말은 공황이었다 신발 뒤축만 따라 돌계단 내려올 때 10월의 별들 이빨을 물고 물때를 아는 파도가 모래의 발등을 적시듯 기다리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한 번은 불시착하는 것 집 떠난 소년처럼 낯선 항구를 떠돌다가 마침내 고향집 문 앞에 서는 것 다만 그 망망대해, 혼자 남는 날 내가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표정에 대해서 숙고 중인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자세로 마지막 잔을 비워야 하는가 덜 추해지는가 거울 앞에서 3류 배우처럼 이리저리 표정을 잡아보는 것이다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사 메모 - 박승민 지금 이 세상 어느 수은등 밑에서 울고 있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했다 세상이 우리를 돌게 할지라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기..

한줄 詩 2018.05.14

문밖에서 - 박용하

문밖에서 - 박용하 사람을 아끼는 일이 일 중의 일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여러 세월이 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하게 사는 것이 힘들었다 세상을 버리는 야심이 세상을 지배하는 야심보다 더 지고한 야심일 수도 있었다 남이 보라고 들으라고 울 수는 없었다 그것이 한계였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다 성자는 따로 있었지만 외따로 있지는 않았다 남의 자식을 지 새끼처럼 키우는 성자가 대문 바로 앞에 산다는 것을 안 것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나쁜 일은 생색내기 딱 좋았다 좋은 일은 얼굴을 들고 다닐 정도로 한가롭지도 않았다 사람을 아끼는 일이 일 중의 일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눈먼 사랑과 눈뜬 죽음이 가버린 후였다 세상에 내 몸 아닌 것이 없겠지만 내 몸보다 귀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 처한 천하 대사일 거라고 생..

한줄 詩 2018.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