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의 구멍 - 김점용 그가 왔다 오래전에 죽은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타던 낡은 자동차를 물려받아 여수로 설악으로 안면도로 멀리서 나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수십 번을 불러도 오지 않던 그가 젊은 모습 그대로 나를 찾아왔다 오른손엔 붉은 펜을 왼손엔 황금빛 놋 열쇠를 쥐고 왔다 그는 생전과 달리 부끄럼을 많이 타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미안하다는 뜻인지 고맙다는 뜻인지 웃음의 햇살만큼 나는 어두워지고 붉은 펜을 받아 그의 옷에 내 이름을 적어넣었다 놋 열쇠는 받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할 사람 그러나 한번은 뜨겁게 안아주어야 할 사람 두 팔 벌려 힘껏 껴안으니 갑자기 늙어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살 그의 뼈가 내 몸으로 다 흘러온 듯 백발 성성한 햇살 그림자가 조그만 열쇠 구멍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