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 김유석
점점 사소한 것들이 길을 앞서는군요.
기억 속으로 배웅했던 것들마저 덥석덥석 뒷덜미를 잡아채고
두근거림으로 끝나버리곤 하는 마음의 허공
물기어린 당신의 눈빛조차 자꾸 희미해져 가는군요.
당신의 아름다운 복선, 집 떠나던 송아지의 눈망울로부터
다시 허공에 쓰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꿈들이 읽혀졌는가.
소년을 세우던 언덕은
가을소나기에 쫓기는 중년의 등 뒤로 거미줄을 늘어놓고
방아깨비 같은 소년의 영혼을 기다리는데
당신은 허구, 멀리서 바라봐야만 선명한 물기둥
먹구름을 뜯으며 우는 늙은 소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
이젠 당신이 내게로 오세요.
건너지 못하는 골짜기에 걸터앉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추억해줘요.
물방울의 몸을 빌어 들어 올린 나의 바닥을
저녁햇살로 천천히 끌어내려 주세요.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봄날은 간다 - 김유석
오랫동안 내게 고별하는 것들이 없었다. 홀연 멀어져 갈 것들을 위해
비워두는 마음의 자리마다
배웅도 저버리지도 못하는 것들이 꽃을 피우고,
지워내는 동안 내 그리움은 강 건너 풍경처럼 아득했다.
밭을 갈아 씨감자 놓는 내외(內外)의 가슴을 메아리져 오는 뻐꾸기 울음도
한갓 먼 소리일 뿐, 가는 길 끊고
무심히 맞받아 울어줄 세월의 골짜기 패이지 않았다.
무얼 심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따뜻한 확신인가
꽃 진 자리마다 젖꼭지 같은 열매가 밑드는 줄도 모르고
내내 봄을 혼자 상처 입으며
애꿎은 강물에 물수제비만 떴다.
이 많은 감자알들을 어떻게 버려야 하나
# 김유석 시인은 1960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전북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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