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치매 병동의 여름날 - 최세라

치매 병동의 여름날 - 최세라 어제의 구겨진 낮은 스팀을 뿜는 병상처럼 처음 보는 얼굴로 아스라히 퍼진다 허리를 굽혀 몇 번씩 인사하던 바람이 귀퉁이가 접힌 채 병동 안을 들여다보고 여기서 떼는 발자국은 언제나 초행 태(胎)벽에 어룽진 저의 내세를 보는 뱃속 아이처럼 여러 번 소개된 말들이 다시금 번복된다 순간순간 지워지는 기억들이 칼싸움하는 설형문자다, 저 기하의 주름살들은 물밑으로 친밀한 당신들, 한 사람의 주름 위로 또 한 사람의 발바닥이 포개지고 귀가 커지는 순간 입술이 쪼그라드는 순간마다 혀를 길게 내밀며 배냇짓한다 이 없는 잇몸을 드러낸 웃음으로 귀퉁이에 붙은 개밥바리기 같은, 기억을 쪼그라뜨린다 처음을 꼭 쥐고 있는 갓난아기의 손바닥에 당신들의 무더운 한때가 웃으며 굴러다니는 것은 낯익은 자..

한줄 詩 2018.08.01

버려진 인형 - 박순호

버려진 인형 - 박순호 계집아이가 전봇대 아래 인형을 버리고 홱 돌아선다 늘 곁에 두어 눈도 맞추고 함께 잠도 잤을 인형의 눈이 외눈박이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닫아 버린 대문 앞 누군가 입술에서 뽑아 던진 담배꽁초가 향처럼 타들어 간다 어제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를 갓난아이를 내다버리고 오늘은 노망난 모친을 내다 버리려는 궁리 속에 대문은 불온한 제상(祭床)으로 눕혀진다 분리수거함에는 몇 백 년을 두고 썩지 못할 기억들이 수북하고 내장 같은 골목 구석구석에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듯이 봉해진 크고 작은 쓰레기 종량제 봉지들이 엎드려 있다 저 충만하게 채워진 골목의 그늘을 싣고 후진하는 쓰레기차 꽁무니에서 울리는 엘리제를 위하여,,,, 언젠가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독주곡이 되어버렸다 골목으로 접어..

한줄 詩 2018.07.31

염장 - 박철영

염장 - 박철영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다 느낌대로라면 속이 뒤집혀야 맞다 그렇지만 의외로 편하게 들린다 간만에 물어오는 안부에다 염장을 지르고 싶단 그 말 내 몸 어딘가에 붙어 있어야만 될 그것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가 삶의 진득한 말과 버무려져 되돌아오는 것이라서 되려 반갑다 누군가 내 염장을 질러 주는 것 그것도 품앗이 같아 거저 해 주는 게 아니라는 것 자신의 허실을 찾아내 치고 들어오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허물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나의 허물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 누군가 염장을 질러 줄 것 같아 은근히 기다려 보지만 그런 사람 요즘 찾기 힘들다 *시집, 월선리의 달, 문학들 간짓대, 박철영 시골집 안마당에 맨살로 늘어선 빨랫줄을 받치고 서 있는 간짓대 팔월 한낮 더위에 힘도 좋다 푸른..

한줄 詩 2018.07.30

당대의 가치 - 전대호

당대의 가치 - 전대호 그들이 이전 세대에 반기를 들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대부분 반성 없이 앵무새처럼. 그러나 잘 들어라 그들은 항상 당대에 반발했다 그대는 어디에 칼을 겨누고 있는가? 죽은 아버지들의 무덤인가, 잔치 때마다 동원되는 전범(戰犯)들의 시체인가 항상 당대에 반발했던 이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전 세대를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나 지금에나 사람들은 싸우는 자의 편이 아니니까. *시집, 성찰, 민음사 소년과 돌 - 전대호 날마다 거기 나가 그것을 보면서 소년은 기록했다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 그것의 모양 그것의 움직임 아니 그러나 소년은 한번도 그것이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다 평지를 구르는 굴렁쇠처럼 여러 날과 여러 해가 지나고 또 그냥 지날 듯 다가온 어느 날 소년은..

한줄 詩 2018.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