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를 넘긴다 - 이강산

마루안 2018. 8. 7. 23:01

 

 

아버지를 넘긴다 - 이강산


벽에 걸린 사진 한 장
폭설에 파묻혀 저절로 흑백사진이 되어버린 식민지 사택
이사철마다 앨범과 수백 권의 책을 뒤져
십 년 만에 액자에 담았다
'올챙이 적 개구리를 꿈꾸던 집-89.12.24'
인화지 뒷면엔 그렇게 쓰여 있다
그 시절 로맨티스트 청년 하나가
천정 뚫고 쏟아지는 햇살 아래
슬픔의 채송화를 키우던 집
잃어버린 흑백사진 한 장이 더 있다
여든다섯에 이르도록 개구리가 되어본 적 없는
장돌뱅이 톱장수 아버지
그 올챙이 아버지를 찾아
벌겋게 녹슨 기억의 책갈피를 넘긴다
아아, 낡은 책갈피 따라 철벙철벙 넘어가는
올챙이의 무논들이여
아오지, 청진항, 관부연락선, 안면도, 춘천, 문의....
어딘가 묻혀 있을 아버지를 세상에 꺼내놓는 일이
아버지에게 갇혀 있는 나의 탈출이라도 되는 듯
그래야만 나도 개구리가 된다는 것처럼
5년 전, 10년 전, 30년 전, 60년 전의
아버지를 넘긴다


*시집, 물속의 발자국, 문학과경계


 

 

 

 

뒤꼍 - 이강산


내 기억의 만 리 밖 아카시아나무 아래
첫 집의 뒤꼍엔
고드름 채송화 장독대 말라죽은 생쥐
두렵게 두렵게 문풍지 흔들고 가는 어둠의 그림자들....

두 번째 세 번째, 열한 번째 집을 지나
마흔여섯 지나
이제 사방이 뒤꼍이다

풋사과 노숙자 12월의 개나리 깡마른 초승달....

얼먹은 몸 칭칭 철사를 두른 채
생의 장독대에 앉아 노을에 젖는
나는
세상의 뒤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