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구마꽃 - 이동훈

마루안 2018. 8. 7. 15:20

 

 

고구마꽃 - 이동훈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은 없다고 그러셨죠.
질경이 돋아나던 돌밭 어디쯤이었을까요.
뚱딴지 무더기 피던 길모퉁이 어디였던가요.
고추 심고 감자 심던 밭두둑 어디였던가요.
생명 있는 것은 모두 꽃이라는 말씀이
갓 캐낸 감자알처럼 환하게 켜지더군요.
잘 계신가요.
씨알 여무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시더니.
못난 놈 잘난 놈 차별 없이 건사하면서
아이들 곁에서 꽃 피우는 재미로 살겠다고 하시더니.
당신이 떠난 자리엔 질경이가 시퍼래요. 
너무 흔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도 꽃대를 바로 올리는
구둣발에 되우 밟히고 벌레에 숭숭 뚫렸어도
지천으로 살아오는 생명을 당신인 듯 봅니다.
땅속 어둠에서 주렁주렁 달려 나온 뚱딴지를 두고
빛보다 환한 어둠이라는
당신의 뚱딴지같은 소리를 곧이들었을까요.
고구마처럼 꽃을 간직했으나
영영 피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당신의 말을 흉내 내어 봅니다.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은 없다고
고구마 자체가 이미 꽃이라고.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 문학의전당


 

 



돌구멍절 그 여자 - 이동훈


만 년 이어질 인연이 있겠나마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만년송을 찾아
돌구멍절*로 오르는 길
가도 가도 가풀막진 비탈이다.
숲 그늘에 숨 돌리고 있자니
한 여자가 흙바닥에 퍼더앉는다.
엉덩이에 뭉개질 풀이 불쌍해서란다.
뼘도 안 되는 엉덩이라서
풀도 괘념치 않을 거라고
풀도 싫기만 하겠냐고 객쩍이 말했더니
-눌리어 봤나고
여자는 짓궂게 되묻고 일어섰다.
여자를, 그 여자의 엉덩이를
털레털레 좇아 오르니
돌구멍절 해우소다.
돌기둥 사이로 볼일을 볼 것 같으면
한 해가 지나서야 바닥에 닿을 거라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전설을 듣는 사이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암자 뒤로 바위틈을 비집고 나가니
바위에 끼여서도 길차게 자란 만년송이
고개를 척 늘여서 인사를 받는데
그 여자도
집채만 한 엉덩짝이 되어 거기 있었다.
가여운 중생을
밖으로 부릴까 말까 고민하면서.


*돌구멍절: 경북 영천 은해사 중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