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모퉁이에서 풍금을 불다 - 허림

마루안 2018. 8. 8. 20:01

 

 

길모퉁이에서 풍금을 불다 - 허림


삼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나오면
풍금소리가 들리는 모퉁이 식당
몸빼 입은 임계댁이 고등어 굽는다
어디서 왔을까.
낯설게 바라보며 등뼈를 갈라 연탄불에 얹는다
고등어만큼 절은 저녁이 출렁거린다
생선의 비릿함이 연기로 자욱하다
모퉁이 식당 구이집 벽지마다
나 여기 다녀갔다는 문장이 가시처럼 선명하다
또 누군가 떠나려 한다 그러나
떠나기 어디 쉬운가
조씨의 주사를 임계댁은 받아넘긴다
밤 아홉 시 사십 분 직행버스에서 내린
어린 애인들이 키스를 한다
누가 풍금을 연주하는가
그녀를 배웅하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시집, 말 주머니, 북인

 

 

 

 

 

비를 기억하는 풍경의 트라우마 - 허림


구름이 붉게 서서히 불들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놓인 흰 도화지에 빼곡히 채워진 빗살무늬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종아리부터 엉덩이 등허리 할 것 없이 후리고 갔다
종아리는 터져 붉은 피가 튀고 허벅지는 시커멓게 죽고 엉덩이는 후끈 달쳤다

이유 없이 비를 맞던 풍경들이 푸르다

이래서 저래서 안 된다 뭔 잔소리가 많냐 어라 째리면 어쩔 건데 치겠다 쳐봐 밀치고 터지던 유월의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눈물이 따뜻했던 기억만 내 안에 잠겨 있다
시계를 흔들자 내 안의 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가 나를 끌어내 기억들을 재생한다
텅 빈 백지 위에 그림자로 남은
성장이 멈춘
비오는 날이면 울컥 도지는 도발적 몽상과
겁에 질린 짐승처럼 울음으로 다 젖는 환형의 무늬들

빗소리처럼 흩어지는 빗살무늬의 문장들이 구름 속으로 비껴들어 붉게 물들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가족 - 박판식  (0) 2018.08.08
모두 다 과거 - 김익진  (0) 2018.08.08
홀연 - 이승희  (0) 2018.08.08
아버지를 넘긴다 - 이강산  (0) 2018.08.07
돌무덤에 오른다 - 김창균  (0) 201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