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 바깥으로 향하는 한결같은 피의 즐거움 - 박성준

마루안 2018. 8. 7. 22:31



저 바깥으로 향하는 한결같은 피의 즐거움 - 박성준



호스를 끌어다가 책장에 물을 준다
이제 더는 자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게 마음이다
목소리 속에 공터가 있다면
공터를 지나가는 벙어리 대신 말을 앓다가
두 눈 딱 감고 몇천 년쯤 말을 앓다가
너는 이미 죽었다고
추문을 당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이 산 것 같은 책들이
다시 가볍게 말라가는 동안
종이는 나이테를 생각한다
울퉁불퉁 울어버린 공간만큼
뿌리나 그늘이 있었던 적을 생각한다
활자들이 부서지고 빻아지고 물 안에서 저자들이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가라앉고 또 문드러지고
배열을 바꿔 주인 없는 자리를 문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 다녀도 그늘을 빌려 쓰는 이게
마음이다
물을 먹은 책들이 다시 가벼워지는 동안
종이는 무슨 말을 또 붙들고 있나
꼭 한 명쯤 불구를 만들어내는 가족력 때문에
언젠가 제 몫을 다해 미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성격이 되어버린 병은 자주
간밤에 환청을 데리고 들어오고
나는 마음 없는 마음자리에 맘에 들지 않는 그늘자리를 찾아
숨을 놓치고 싶은 그런 마음
물에 젖은 책들은 모두 선인장처럼
잎이 되지 못한 뾰족한 포기처럼
훌륭한 학살의 마음
황홀한 전쟁의 마음
행복한 야만의 마음
호스를 끌어다가 책장에 물을 준다 우연을 끌어다가
마음에 시간을 준다
선인장은 제 속을 적시는 대신 가시를 바깥으로 두고 있고
뼈 대신 가시를 품고 사는 물고기들은 물 바깥이
이미 죽음이란 것을 직감해 오래전
눈을 퇴화시켰다
두 눈을 딱 감고 몇천 년쯤 시간을 참아야
마음이 방치해둔 책에서는 버섯이 자라날까
악몽도 병균이라 꿈에서도 버림을 받고 꿈에서도
식욕이 돌았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다는 듯 낼름
책에서부터 혀를 내민 것들을 나는 가만히 만진다



*시집, 잘 모르는 사이, 문학과지성








사냥꾼 - 박성준



수혈을 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담벼락이 무너진 집에 나무가 깊숙이 서 있었다
반딧불이는 폐가 아파서 분주히 날아다닌다
내용을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상식처럼 출몰했다가
그렇게 꺼지곤 했는지 구름으로 변한
여자의 간은 분노를 이해하기엔 아직 멀었다
약도 들지 않는 동공에는 황달기가 슬픔을 구실 삼아 번지고 있다 아주 먼 옛날처럼
여자의 두 귀는 부르지 않아도 희망에 홀린다
사랑을 모르더라도 쫑긋한 바깥
날카로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쉽게 가혹해지던 빈집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맥박 대신 풀벌레가 자랐다
그사이 여자는 병에 뒤척거리면서도 간신히
용서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저 혀를 깨물어 죽기에는 혀에 퇴적된 말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런 인생을 욕하기에는 뉘우칠 그늘만 깊었다
곁에 누운 바늘은 쓸쓸했다
여자가 사는 집을 조물락 조물락 생각하면서
어딘가를 향해 돌고 있을 조용한 피
나는 내 몫의 두께를 모두 들켜버렸다
의심할 수 없는 저녁이 울창하게 이별을 흔든다
쓸쓸한 두 혀는 골동품 같은 빈 몸을 살다가
목숨에 갇힌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무덤에 오른다 - 김창균  (0) 2018.08.07
다시 아가씨로 돌아갈 수 있다면 - 김병심  (0) 2018.08.07
거룩한 적대 - 조성국  (0) 2018.08.07
고구마꽃 - 이동훈  (0) 2018.08.07
발효된 산 - 강영환  (0) 2018.08.07